본문 바로가기

스포츠둥지 기자단

백옥자, 김영호, 박주봉, 심권호-잊혀져가는 비인기 종목의 레전드

 

 

 

 

 

 

글/조승윤

 

 

 

 

 

  ‘레전드!’ 이 한 단어가 주는 위엄은 대단하다. 한 선수가 레전드로 불리는데 정해진 조건은 없다. 대중들이 한 선수를 레전드라고 부르는 이유에는 무의식적 공감대가 있다.  레전드라는 수식어는 아무한테나 붙지 않는다.  선수들에게는 우승과 함께 레전드라는 수식어를 얻는 것은 또 하나의 명예다. 역사 속 영웅들이 세운 업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향력이 더 두드러진다. 스포츠 역사 속 레전드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인기 종목의 레전드들은 사람들 기억에서 쉽게 잊힌다. 화려한 인기종목의 그늘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인기 종목이 각종 대회가 끝난 이후에도 대중들의 관심이 지속되는 반면, 비인기 종목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 지나면 대중들의 관심이 빠른 속도로 식는다.
 그렇다보니 비인기 종목의 레전드 선수들은 그들이 써내려간 역사에 비해 미흡한 대우를 받고 있다.  한국 스포츠 발전과 성장에 기여한 레전드들을 소개하고, 그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아시아의 여장사’ 백옥자
 한국 육상, 특히 투척 종목은 불모지에 가까울 정도로 취약한 스포츠 종목이다. 그러나 투척 종목에서 각종 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의 위상을 높은 선수가 있다. 바로 ‘아시아의 여장사’ 백옥자다. 
 

1951년생인 백옥자는 중학교 시절부터 남다른 힘을 갖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육상 투척을 시작했고, 이는 곧 한국 육상 전설의 시작이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인 1968년, 제14회 경기도 체육대회에서 14m02cm를 기록하며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자신이 세운 기록을 갈아치우며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백옥자 선수의 경기 폼(사진=체육학대사전)

  

 백옥자의 활약은 국제대회에서도 빛을 발했다. 1970년 제6회 방콕 하계아시아경기대회 투포환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2대회 연속 우승을 기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특히 테헤란 대회에서 그가 기록한 16m28cm는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백옥자의 업적은 단순히 기록으로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의미가 크다. 그의 성과는 한국 육상의 발전의 뿌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스포츠 종목 중 가장 취약하다고 평가 받는 육상에서 나타난 그의 활약은 한국 육상이 무너지지 않은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70년대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보여준 백옥자의 국제대회 활약은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건물의 첫 토대를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최종 건축물의 결과가 달라진다. 백옥자는 그 토태를 단단하게 형성한 인물이다. 한국 육상의 기반을 단단하게 다진 백옥자는 한국 육상의 레전드이자 역사이다.

 

‘펜싱의 꽃’ 김영호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 확정 후 포효하는 김영호

 

 

 플뢰레는 프랑스어로 꽃을 의미한다. 한국 펜싱의 꽃이자 레전드는 바로 김영호다. 그는 한국 펜싱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펜싱 금메달리스트다. 최근 높아지고 있는 한국 펜싱의 국제적 위상의 시작은 김영호라고 할 수 있다. 
 

1971년생인 그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스타 탄생을 알렸다. 그러나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김영호의 금메달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각각 은메달에 그치면서 김영호와 팬들은 모두 아쉬워했다. 심지어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이후 그는 기흉 수술까지 받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의 펜싱 선수 생활을 의심했다. 기흉 수술은 호흡에 문제를 느낄 만큼 스포츠 선수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흉 수술 이후에도 꾸준한 훈련으로 정상적인 폐활량을 회복·유지했다. 결국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유럽의 강호들을 차례로 꺾으며, 그는 정상에 올랐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상대의 수를 읽는 영리함, 그리고 펜싱에 대한 열정은 김영호에게 레전드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도록 했다. 유럽 선수들의 전유물이자 올림픽 104년 역사상 아시아 선수 최초의 펜싱 챔피언인 김영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펜싱의 레전드다.

‘단체전의 황제’ 박주봉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면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한국 배드민턴의 전설은 박주봉이다. 박주봉은 세계 톱클래스 복식 전문 선수였다. 특히 역대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총 5회(남자 복식 2회, 혼합 복식 3회) 월드챔피언십 타이틀을 보유할 만큼 복식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진영오픈 배드민턴 챔피언십에서도 9회 우승했으며,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했다.

 

         ▲일본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박주봉 감독.(사진=연합뉴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 후 환호하는 심권호 선수.(사진=국제올림픽위원회)

 

 박주봉의 기록은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다. 특히 국내 대회 103연승, 국제 대회 71회 우승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박주봉이 세계 최고의 복식 선수인 이유는 남자 복식과 혼합 복식 모두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남자 복식 금메달을 획득했고, 이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혼합복식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64년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52세인 그의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7년간의 선수 생활 이후에도 박주봉은 지도자 영역에서 전설의 길을 걷고 있다. 그가 맡는 팀은 항상 좋은 성적을 거둘 만큼 지도력이 뛰어나다. 영국, 말레이시아를 거쳐 현재는 일본 배드민턴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있다. 최근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일본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은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하나씩 획득하면서 다시 한번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스타 선수는 스타 감독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박주봉은 이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선수에서부터 감독까지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배드민턴의 레전드이다.


‘신의 영역’ 심권호
 한국인 최초의 레슬링 명예의 전당 헌액, 두 체급 그랜드 슬램, 작은 거인. 이 표현들은 모두 한 선수를 위한 말이다. 그 선수는 한국 레슬링의 전설 심권호다.
 심권호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그레코로만형 48kg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화려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아시안게임 이후 같은 체급 아시아선수권대회, 세계선수권대회, 1996 애틀랜타올림픽을 석권하면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일생 동안 한 번도 하기 힘들다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지만 심권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48kg급이 사라지자 체중을 불려 54kg급에 도전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네 대회 정상에 오르며, 다른 체급 두 번의 그랜드슬램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
 

심권호의 레슬링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그를 레전드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다. 2013년 2월 레슬링이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퇴출 되었을 때, 심권호는 가장 먼저 레슬링 후배들을 생각했다. 올림픽만을 바라보고 훈련해온 후배들의 앞길이 걱정돼 백방으로 뛰며 레슬링 부활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같은 해 9월 레슬링은 올림픽 종목에 채택되었고, 심권호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만큼 기뻐했다.
 심권호에게 레슬링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나!”라고 답했다. 그에게 레슬링은 전부인 것이다. 어쩌면 명예의 전당에 등재된 심권호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닌, 레슬링 역사에 심권호라는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명예로운 사건일 것이다.

 

 

 ⓒ스포츠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