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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둥지 기자단

‘50년’의 축구화 수선 외길 인생

 

글/이원희

 

 

 

‘축구는 제 일생에 빼놓을 수 없는 한부분입니다.

           축구를 빼놓고 박지성이란 이름을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축구계의 전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었던 박지성은 자신의 인생을 축구에 비유했다.

 

축구화 수선계에서는 50년 넘게 외길을 걸어온 김철(67)씨가 그랬다. ‘내가 편하면 손님이 불편하다’는 철학을 가지고 한 평생 축구화를 만져온 김철 씨.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봐도 “이 일만은 내가 해야 한다”는 그를, 세상은 진정한 ‘축구화 수선의 장인’이라고 부른다.

 

서울 중구에 위치 한 어느 단층 빌딩, 3평이 채 안돼 보이는 ‘금성 축구화 수리점’이 김철 씨의 일터다. 성인 남성이 두 명만 들어가도 꽉 채워지는 작은 가게의 내부, 작업장은 온통 먼지 투성이이다. 아침 9시에 하루를 여는 그의 일과는 보통 자정이 다 돼서야 끝난다. 하지만 축구화 하나를 수선하는데 50여 가지의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새벽 3, 4시에 끝나는 날도 허다하다. “신발 안쪽에 파인 부분을 매끄럽게 덮어줘야 하고 터진 쪽도 붙여 줘야 해요. 축구화 한 켤레 수선하는 데만 못 60개 이상을 박아야 하니 끝이 없습니다.” 축구화 제작 기술이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김 씨의 수선 작업도 더욱 어려워졌다. “요즘 축구화는 재료가 워낙 천차만별이에요. 재료부터 구하는 게 일이죠. 일단 신소재가 나오면 기존의 약품이 잘 먹혀들지 않아요. 그래서 축구화가 발전할 때마다 연구를 해야 했죠. 실험도 여러 번 했습니다.” 비단, 발전한 건 축구화 재료만이 아니다. “색깔도 어찌나 많아졌는지 몰라요. 같은 노란색이지만 누런색, 레몬색 등 다양하잖아요. 예전에는 검정색 하나였는데 말인데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손님이 원하면 해줘야죠.”

 

 

                  (금성 축구화 수리점의 대표인 김철 씨가 수리중인 축구화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금성 축구 수리점’은 일반 가게와 다르게 토요일은 물론, 일요일에도 문을 연다. 주중에 일하는 직장인과 공부하는 학생들 때문이란다. 매일 쉬지 않고 일하는 김씨지만 모든 축구화를 한 번에 수선 할 수는 없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도 평균 10켤레 이상을 넘지 못한다. “수선이란 게 만만치 않습니다. 축구화도 숙성이 필요한 거죠. 본드 칠한 게 굳어야하고 외관에 약품 바른 것도 말라야해요. 또 수선이 끝나도 축구화가 제 모양을 찾아가도록 기다려야죠.”

 

그렇다고 김씨의 고객들이 모두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갈색 폭격기’ 차범근, ‘반지의 제왕’ 안정환, ‘리베로’ 홍명보, 그리고 2014 브라질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첫 골의 주인공, 이근호 등이 모두 김철씨의 단골들이다. “내가 수선한 축구화를 신고 선수들이 경기에 뛰는 모습을 보면 정말 설레더라고요. 게다가 득점까지 하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죠.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이)근호의 골을 보고 내가 넣은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하나하나 살펴야하는 세심한 작업을 수십 년 동안 해오다보니 김 씨는 이제 축구화만 봐도 사람들의 발 모양을 척척 맞춘다. 선수들의 장단점도 금새 파악한다. “신발 끈이 꽉 묶인 축구화들이 많아요. 일명 ‘줄다리기’라고 하죠. 그런데 이렇게 신발 끈을 꽉 묶는 것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발에 무리가 올 수 있으니까요.”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축구화 수선 작업

 

 제법 어린 티를 벗어나던 나이 열여섯. 한창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였지만 김 씨의 집안은 가난했다. 6.25 한국 말미에 고향인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월남했기에 그저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하기도 바빴다. 운명이었을까. 마침, 그가 살던 집 앞에 스포츠신발 공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신발 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곧바로 신발을 수선하는 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3년 정도는 허드렛일을 했어요. 공장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일애서부터 온갖 종류의 뒤처리를 맡았죠. 틈틈이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워가며 꾸준히 수선을 익혔습니다.”

그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무엇보다 김 씨의 성실함을 따라 갈 자가 없었다. 신발이 완성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공장 동료들이 퇴근 후에도 그들이 하던 일을 따라해 보며 실력을 키워갔다. “찹쌀로 된 풀로도 붙여보고 비슷한 모형도 만들었죠. 신발이 뜯어지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감쪽같이 고쳐보려고 했지요.” 그의 노력을 바라본 선배들도 기특했는지 본격적으로 일을 가르쳐줬다. 그렇게 또 3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기술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자신만의 스포츠화 수선점을 열었다. “복싱화, 야구화, 축구화 등 모든 스포츠화는 다 만져 본 거 같아요. 하지만 축구화 수선 일이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축구화만을 전문적으로 수리하는 ‘금성 축구화 수리점’이 탄생했다.

 

                                                         (수리점 안에 진열 되어 있는 축구화)

 

 열심히 일했고 손님들의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이곳을 지켜온 그다. “여기도 많이 변했습니다. 주변 건물들이 저리 높아졌잖아요. 이제는 우리 가게처럼 작은 곳도 별로 없죠. 그래도 많은 손님들이 금성 수리점을 찾아주시니 언제나 고맙습니다.” 또한 금성 수리점에는 수십 년 된 단골손님들이 여럿 있다. “부자가 함께 이곳에 축구화를 맡기는 단골손님이 있어요. 먼저 아버지가 30년 동안 저희가게를 찾으시다가 그 아들도 금성 수리점에 축구화를 맡기더라고요” 이 뿐만이 아니다. “이전에는 서독 대사관에서 온 외국인 남자가 자주 들렀었죠. 또 한 대학생은 지인들까지 데리고 와서 이곳의 단골손님이 되었습니다.”라며 웃었다.   

 

사업이 번창하다보니 각종 대형 스포츠브랜드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깜짝 놀랄만한 액수를 제시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제안을 모두 거절한 김씨다. “대기업과 계약했으면 돈은 많이 벌었겠죠. 하지만 돈벌이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 한 분 한 분이 내겐 가장 소중합니다.”

 

 

                                                (축구화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 김철 씨)

 

 

          

 그리고 꿈, 그가 살아가는 이유

 

김철 씨에게는 꿈이 있다. “아들에게 축구화 수리점을 가업으로 물려 줄 생각이에요. 지금 막내아들이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두 가지 기술만 더 배우면 나만큼 할 거 같아요. 나중에 ‘아버지보다 못 한다’는 소리는 절대로 듣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행히 젊었을 적의 나보다 수선 일을 빨리 배웁니다. 하하하.” 여느 아버지와 다름없이 아들 자랑에 행복해 하는 그의 웃음소리가 가게 안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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