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성수
만약 당신에게 “축구 강국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라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아마도 스페인이나 브라질, 이탈리아 같은 나라를 언급할 것이다. 실제 이 나라는 월드컵이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의 뇌리에 ‘축구 강국’으로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축구의 역사가 축구 강국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 것은 아니다. 때론 축구 약소국이라 평가받던 국가들이 강국들의 콧대를 멋지게 꺾으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적도 있다. 이러한 약소국들의 승리는, 약자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물론, ‘절대 강자는 없다’ 라는 스포츠계의 평범한 진리도 재확인 시켰다. 그렇다면 축구 약소국들의 화려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1. 1970년 멕시코 월드컵. 페루
페루의 전설적인 선수 쿠비야스가 페널티킥을 차고 있다. (사진출처-FIFA)
남미의 축구 변방인 페루. 페루가 팬들의 기억 속에 남을 만한 모습을 보인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총 4회(1930, 1970, 1978, 1982)의 본선 진출 횟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모두 오래전 이야기들이고, 심지어는 남미 클럽 대항전에서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와 함께 우승팀을 배출하지 못한 국가로 남아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도 꼴찌를 기록한 페루. 그들에겐 월드컵 진출은커녕 브라질,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 국가들을 상대로 하는 것 조차 버거워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시절은 있었다. 그때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사실 페루는 1970 월드컵을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1964년 올림픽 예선에서 대표팀이 아르헨티나에 패하자 분노한 관중들의 난동으로 350명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고, 1970년엔 지진으로 안데스 산맥에 있는 15개의 페루 도시가 붕괴되기도 했다. 하지만 페루는 주저앉지 않았다. 브라질 최고의 스타 출신인 디디 감독의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본선에 오른 페루는 서독, 불가리아, 모로코와 함께 D조에 편성됐다. 페루의 첫 상대는 불가리아. 당시 불가리아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적 있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불가리아의 데르멘지에프와 보네프에게 두 골을 허용하며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 했지만, 후반부터 페루의 공격이 불을 뿜었다. 후반 5분 가야르도의 동점골로 추격에 나선 페루는 후반 10분 춥피타스의 동점골로 따라붙는데 성공했다. 치열한 경기는 후반 28분 쿠비야스의 역전골로 마무리 되었고 결국 페루의 3-2 역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흐름을 탄 페루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다음 상대인 모로코도 쿠비야스의 두 골과 차예의 골로 3-0 압승을 거둔 페루는 서독에게 1-3으로 패하긴 했지만, 2승1패로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8강 상대는 브라질. 당시 브라질은 펠레, 히벨리노, 토스타오, 자일징요 등이 중심을 이룬 팀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역대 최강의 팀으로 평가 받는 팀이었다. 역시 브라질이 선제골로 앞서나갔다. 전반 11분 왼발의 명수라고 불리던 히벨리노가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이후 전반 15분 토스타오의 골로 스코어는 2-0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페루 역시 무너지지만은 않았다. 전반 28분 가야르도가 만회골을 넣은 것이다. 후반 7분 토스타오가 다시 한번 골을 넣긴 했지만 페루 역시 후반 25분 쿠비야스의 골로 3-2까지 따라붙으며 끝까지 브라질을 괴롭혔다. 하지만 페루의 추격은 여기까지 였다. 브라질은 후반 30분 자일징요의 골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고, 결국 4-2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진출했다. 비록 아깝게 4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페루의 분전은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고국에 희망이 되었다. 또 당시 처음으로 만들어진 FIFA 페어플레이상을 처음으로 수상하며 4강 진출 실패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당시 페루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인 선수는 테오필로 쿠비야스. 쿠비야스는 21세의 나이로 5골을 터트리며 득점 랭킹 3위에 오르는 돌풍을 보였고, 2년 후엔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기쁨도 맛봤다. 현재 클라우디오 피사로(바이에른 뮌헨)외엔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페루 축구. 그들에게 과거의 영광은 돌아올 수 있을까?
2. 1994년 미국 월드컵 불가리아
스토이치코프는 불가리아의 영광을 이끈 선수다. (사진출처-FIFA)
유럽 동부에 위치한 나라 불가리아. 불가리아는 올림픽에서 한번의 동메달(1956)과 한번의 은메달(1968)을 차지하긴 했지만, 꽤 오래전의 일이다. 월드컵에서도 총 7회 (1962, 1966, 1970, 1974, 1986, 1994, 1998)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들은 16강 진출은커녕 1승을 거두는데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불가리아는 월드컵에 첫 진출한 이후로 무려 17경기 동안 승리하지 못했고, 월드컵 역사 상 최다 경기 무승 이라는 불명예도 가지고 있다. (2위는 대한민국 14경기) 하지만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그리스를 4-0으로 격파하며 첫 승을 거둔 이후로 그들의 화려한 서막이 시작 됐다. 첫 경기인 나이지리아에서 0-3으로 패하고 그리스를 4-0으로 이긴 불가리아는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만났지만, 후반 16분 스토이치코프의 선제골과 후반 45분 시라코프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며 조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 만난 상대는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 불가리아는 전반 6분 스토이치코프의 골로 앞서나갔지만 멕시코는 전반 18분 가르시아 아스페의 페널티킥으로 균형을 맞추었다. 이후 양 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한채 승부차기로 넘어갔다. 승부차기에서 첫 번째 키커로 나선 아스페와 발라코프가 모두 실축하며 피 말리는 승부가 계속되었지만, 불가리아는 겐치프, 보리미노프, 레치코프가 모두 골을 성공시키는 동안 멕시코는 베르날, 로드리게스가 실축했고, 결국 불가리아가 승부차기 끝에 3-1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독일. 대부분의 팬들은 독일의 승리를 점쳤다. 당시 독일은 위르겐 클린스만, 로타르 마테우스, 마티아스 잠머 등으로 이루어진 막강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후반 2분 독일이 마테우스의 페널티킥 골로 앞서나갈때만 해도 예상은 맞는 듯 했다. 하지만 후반 중반부터 불가리아가 기적을 만들어갔다. 후반 30분 스토이치코프가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후반 35분엔 레치코프가 골을 성공시키며 기어이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결국 2-1로 역전승을 거둔 불가리아는 사상 첫 4강 진출에 위업을 달성했다. 4강전에서 만난 이탈리아전에선 로베르토 바조의 원맨쇼에 당하며 1-2로 패했고, 3-4위 전에서도 헨릭 라르손이 버틴 스웨덴에게 0-4로 패했지만, 이전 대회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불가리아가 4강에 오른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불가리아의 돌풍을 이끈 선수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그는 심판의 다리를 밟는 등 다혈질적인 성격에 애연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미국월드컵에서 6골을 몰아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미국월드컵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1994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는데 이는 불가리아 선수 중 유일하게 스토이치코프만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다. 또 그는 FC바르셀로나의 주 공격수로 활약하며 세 시즌 연속 프리메라리가 우승과 1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이후 불가리아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1무2패를 기록하며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고, 유로2004에서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 메이저대회에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불가리아는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마르틴 페트로프 등 우수한 선수들이 이끌고 있다. 이들이 과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3. 2007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방글라데시 아시안컵 이라크
2007년 AFC 아시안컵 MVP인 유니스 마흐무드(오른쪽) (사진출처-FIFA)
2007년 아시안컵은 조금 특별(?)했다. 아시안컵은 하계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열렸지만, 이 대회는 1년 앞당겨 개최되었고, 무려 4개국이 공동 개최를 했기 때문이다. 우승국마저 특별했다. 단 한번도 우승한 적이 없는 이라크가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중동에 위치한 나라 이라크는 1986년 월드컵 출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4강 등의 성과를 가지고 있지만, 사우디나 이란 같은 다른 중동국가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다. 게다가 이라크의 치안은 매우 불안하다. 2003년에는 미 영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지금도 여러 폭력사태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곳이다. 하지만 2007년 이라크는 브라질 출신의 조르반 비에이라 감독의 지휘 아래 반란을 꿈꾸고 있었다. 태국, 호주, 오만과 함께 A조에 속한 이라크는 첫 경기인 태국과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다음 상대는 호주. 대부분 호주의 우세를 점쳤지만, 전반 23분 나샤트의 선제골로 오히려 이라크가 앞서나갔다. 후반 15분 마크 비두카에게 동점골을 허용했지만, 이라크는 하와르와 카라르의 연속 골로 호주를 3-1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오만과의 경기에서 0-0으로 비긴 이라크는 결국 조 1위로 8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베트남. 이라크는 이 경기에서 이른 시간에 선제골로 기선을 제압했다. 전반 2분 이라크 최고의 스타인 유니스 마흐무드가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기세가 오른 이라크는 후반 21분 유니스가 추가골까지 성공시켰고, 결국 2-0 승리를 거두었다. 4강에 진출한 이라크는 국토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4강 상대는 대한민국. 이라크는 대한민국을 무려 23년간 이기지 못했던 터라, 이번 만큼은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었다. 게다가 아시안컵이 열리기 전 제주에서 열린 평가전에서도 대한민국이 3-0으로 이긴 터라, 대한민국의 승리가 강하게 점쳐졌다. 실제 대한민국은 이천수, 조재진, 염기훈 등을 앞세워 이라크를 압박했고, 이라크는 수비진을 두텁게 한뒤 유니스로 하여금 역습을 노리는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볼 점유율에서 앞서며, 한수 위 기량을 선보였지만 좀처럼 골문을 열지 못했고, 이라크 역시 이따금씩 유니스가 골을 노렸지만 김진규와 이운재가 버티고 있는 수비진을 열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0-0으로 끝났고, 승부는 승부차기로 넘어갔다. 승부차기에선 ‘승부차기의 신’이라 불린 이운재가 버티고 있는 대한민국이 유리해 보였지만, 이라크 키커로 나선 모하메드, 무니르, 압둘 아메드, 메나제드가 모두 골을 성공시켰다. 대한민국 역시 키커로 나선 선수들이 침착하게 성공시켜 나갔지만 네 번째 키커 염기훈의 슛은 키퍼 선방에 막혔고, 다섯 번째 키커 김정우의 슛은 골대를 맞췄다. 결국 이라크가 승부차기 끝에 대한민국을 4-3으로 누르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에 오른 이라크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고, 결승에서 만난 사우디 마저 1-0으로 꺾고,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컵을 제패했다. 자국 대표팀의 아시안컵 우승 소식에 이라크는 환호로 가득했다. 특히 이라크는 아시안컵 본선행 경비를 마련하기 어려워 AFC로부터 특별 보너스를 받기도 했고, 전력 공급 사정이 좋지 않아 자체 발전기 가동을 위해 석유 사재기가 발생하는 등 타 국가보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뚫고 우승한 터라 기쁨은 두배가 되었다. 하지만 세리머니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베트남을 꺾은 후 흥분한 사람들이 총기 세리머니를 벌이다 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대한민국을 꺾은 후엔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덕에 대회 종료 후 이라크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 최고의 활약을 펼친 유니스 마흐무드는 불참했고, 비에이라 감독은 총리까지 만류에 나섰지만, 대표팀 감독직을 사퇴했다. 이라크의 놀라운 성과는 스포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건 중 하나로 불릴 만하다. 하지만 불안한 치안 탓에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이들의 업적을 퇴색시켰다. 이라크는 여전히 치안이 불안하고, 우리나라에선 여행 금지 국가로 지정하고 있다. 2007년 보여준 이라크의 봄날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왕년에 금송아지 한번 안 키워본 사람 있나?” 하는 말이 있다. 앞서 소개한 국가들도 현재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있지만, 왕년에 금송아지 한번 씩은 키워본 셈이다. 하지만 이들이 금송아지를 키웠던 과거만 회상한다면, 발전은 없을 것이다. 과연 이들 국가들이 미래에 금송아지를 한번 더 키울 기회가 올지 주목된다.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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