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포츠둥지 기자단

[단독취재] “신아람, 하이데만의 기막힌 운명”

 

 

글 / 이아영 (스포츠둥지 기자)

 

            대한민국 펜싱의 간판스타 신아람이 세계무대 정상에서 운명의 적 독일의 브리타 하이데만을 만났다. 이번에는 결승전이었다. 신아람은 런던 올림픽에서 당한 오심경기에 복수라도 하듯 하이데만을 누르고 펜싱 월드컵 A급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 것도 다음 올림픽이 열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말이다. 이 무슨 운명적인 만남인가? 신아람은 이로써 국제펜싱연맹의 여자 에페 세계랭킹 순위에 두 단계 뛰어오른 4위에 등극하게 되었다. 자신의 역대 세계 랭킹 중 최고의 성적이다.

 

RIO WORLD CUP 2013 정상에 선 신아람 선수와 심재성 코치 ⓒ FIE 공식포토그래퍼 제공

 

온 국민의 희망을 뺏어갔던 충격의 “1초사건”을 기억하는가?

역대 5대 올림픽 오심 장면으로 꼽힐 만큼 충격적이었던 2012년 런던 올림픽 펜싱 여자 에페 준결승 경기에서 대한민국 펜싱의 신아람 선수가 억울하게 결승행 티켓을 빼앗겼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신아람 선수가 이겼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그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었다.

 

이 참담하고 답답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 것은 위로의 특별상, 공동 은메달 추진이나 판정 번복으로도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대한민국은 자존심을 다치고 말았다. 국민들은 정정당당하지 못한 상대 선수와 팔은 안으로 굽으니 눈 감고 팔을 구부리려던 오스트리아 심판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그 날 국제펜싱연맹 공식 SNS 페이지에는 경기를 지켜본 한국인을 비롯한 세계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특히 “Shame on you" 즉 ”부끄러운 줄 알아라“ 라는 글로 도배 되었다.

 

신아람은 공동 은메달이 아닌 진짜 은메달로 국민들의 한을 풀어주었다. 여자 단체전 에페 경기에서 그녀의 경기 모습은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처럼 지칠 줄 모르는 강철체력이었다. 아마 온 국민이 신아람 선수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전해졌었나보다. 속이 다 시원했다. 신아람은 귀국 후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국민 금메달을 전달 받기도 했는데 이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그녀와 함께 아파하고 걱정했었는지를 말해주었다.

신아람은 여자 에페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올림픽에서의 첫 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평생의 꿈이었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의 꿈을 눈앞에서 놓친 것은 가슴 속에서 결코 지울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떠오르고 악몽에서 벗어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언젠가 꼭 무대에서 다시 만나면 설욕전을 하리라 결심했었다.

 

꿈속에서까지 보이던 그 장면…….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그 설욕전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원수를 갚기 위해 10년간 칼을 갈았다는 영화 주인공들과는 달리 신아람은 올림픽이 1년도 채 안 지난 10개월 만에 복수혈전을 펼쳤다.

결승에서 하이데만 선수를 만나니 순간 런던올림픽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런던 올림픽 준결승에서 하이데만을 상대로 생애 가장 길었던 1초를 보내고 나니 피스트 위에서의 기억이 눈을 감아도 생생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순간이지만 그녀들을 숙명의 적으로 만든 극적인 상황이 다시 재현되었다. 승부가 나지 않은 채 5대5로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는데 어드밴티지를 가진 신아람은 계속되는 하이데만의 공격에 수비만 하다가 포인트를 뺏기는 상황까지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에 그녀는 자신의 멘탈을 단단히 챙겼다. 가만히 있다가 당할 수만은 없었기에 달려드는 하이데만의 공격을 막고 반격에 나서 역습 찌르기로 오히려 득점을 했다.

 

RIO WORLD CUP 2013 펜싱 여자 에페 하이데만(좌)과 신아람(우)의 결승 장면 ⓒ FIE 공식포토그래퍼 제공

 

꿈에까지 나왔다던 그 장면을 다시 마주하고 나니 그녀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달려드는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했다면 런던의 악몽을 다시 겪을 뻔 했다. 그러나 역습으로 1점을 먼저 챙기고 나니 2초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고 6대5로 밀리고 있는 상대방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이데만이 두 번이나 득점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일찍이 패배를 인정하고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신아람의 승리였다. 역시 실력은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신아람 선수의 RIO WORLD CUP 2013 금메달 ⓒ 신아람 선수 제공

                              숙명의 적을 물리치고 정상에 자리에 오르다. 이것이 바로 승자의 미소 ⓒ FIE 공식 페이지

 

 

숙명의 적, 마음의 짐을 털어내다…….

경기가 끝나자 하이데만은 신아람 선수에게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했다. 원래 경기 후 선수들은 각자 자기의 출발선으로 돌아가 심판에 지시에 따라 경기를 종료해야 하는데 하이데만은 심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갔다.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하이데만은 신아람을 꼭 껴안았다. 다가와 포옹하는 하이데만을 안으니 그녀의 마음도 뭉클했다고 한다.

 

하이데만은 경기 전에도 신아람과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 대화를 시도했지만 직접적인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자기로 인해 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 무대에서 크나큰 상처를 받았을 상대방에 대해 생각해보니 하이데만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자책감도 그렇겠지만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들 역시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

 

뜨거운 포옹으로 서로의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동적인가……. 이 날 국제 펜싱 연맹의 공식 SNS 사이트에는 “What great pictures(이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라는 말과 함께 그녀들의 포옹 사진이 게제 되며 뜨거운 화재가 되었다.

 

경기 직후 마음의 짐을 털어내는 두 선수의 뭉클한 모습 ⓒ FIE 공식 페이지

 

진솔한 사람, 신아람 선수를 만나다

 한국으로 돌아온 신아람 선수를 만났다. 사실 내겐 “펜싱 신아람 선수”라는 말 보다 그냥 “아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한 친구사이다. 그녀는 지구 반대편 브라질과 쿠바에서 각각 빠듯한 경기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다가오는 시합을 준비하느라 쉴 틈이 없다. 현재 한국체육대학교 석사과정을 다니며 학업을 병행하는 그녀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보내고 있다. 아람이는 6월에 있을 아시아 선수권 경기를 위해 며칠 뒤 상하이로 출국하고, 돌아와서 곧바로 하계 유니버시아드 경기 출전을 위해 카잔으로 떠난다고 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일정이지만 펜싱이 좋아서 즐기는 모습을 보면 경외심이 들기까지 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펜싱에 관해 연구를 잘 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한다.

 

태릉 밖을 벗어나 보통 학생들처럼 사복을 입고 커피숍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소녀 같았다. 아람이는 그 날의 경기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눈이 금세 초롱초롱해졌다.

 

“참……. 시합하러 멀리도 갔어. 브라질까지 얼마나 걸렸어?”

“어휴ㅜㅜ 생각만 해도 또 지치는 거 같아. 너무 멀더라고~ 많이 피곤해서 지쳐있을거라 생각했어. 근데 있잖아 막상 시합 날이 되니까 컨디션이 너~~~무 좋은 거야ㅎㅎ 어느 정도였냐면 결승 경기가 끝났는데도 한 경기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니까? 근데 막상 힘을 다 썼는지 다음날 되니까 단체전 경기에서 맥을 못 추겠더라고(웃음)”

 

컨디션이 어찌나 좋았던지 결승 경기가 끝나고도 한 경기를 더 할 수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에너지 넘치는 경기를 했을까? 난 선수 은퇴한 지 어느덧 4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현역선수로 활동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였다.

 

“난 정말 네가 존경스러워 여자 선수 현역으로 우리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닌데 널 보면 내 뼈가 아파. 하하 너는 안 그래?”

“맞아(웃음) 하하하 진짜로 빼가 아프다니까!”

 

나는 아람이를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꿈나무”라고 부르고 싶다. 여전히 자신이 선택한 삶을 즐기고 그로 인해 행복해하는 모습이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이제 너 정도면 기업에서 스폰서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장난스럽게 던지는 편한 친구에 말에도 ”물론 돈을 많이 받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펜싱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지금에 감사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이 펜싱을 오랫동안 잘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인터뷰를 하려고 만난 건 아니었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웠다. 대화 도중 핸드폰을 열어 장미란 재단에서 온 문자를 보여주며 올림픽 스타와 함께하는 “스포츠 꿈나무 멘토링”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이는 비인기종목 스포츠 꿈나무를 지원하는 사업인데 시간이 난다면 이런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꿈나무 선수들은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근데 현역 선수이다 보니 시간적인 할애가 자유롭지 않아 아쉬워했다.

 

대화를 나누고 나니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이런 훌륭한 선수를 곁에 두고 알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큰 복이며 이런 마인드를 가진 선수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고 싶었다.

 

"이렇게 한 번 밖에 나오면 다시 태릉에 들어가는 게 쉽지가 않아. 어제는 날씨가 딱히 좋았던 것도 아닌데 내 시야 앞에 펼쳐진 그 길이 너무 예쁜 거야. 특별한 이유도 아닌데 그렇게 자유롭게 휴식을 갖고 싶을 때가 있어."

 

선택과 집중, 펜싱 하나만을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고 꿈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이 여기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지치지 않으려면 진정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즐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매달려 있는 다고 하여 이미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아람이가 과거에 연연하여 그 기분에서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툭툭 털고 일어나 몇 일만에 단체전 은메달을 땄을 때부터 알아봤다. 보통 멘탈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람아 내가 못 물어봤던게 하나 있는데”

“응 어떤거?”

“있잖아, 그 오심이 있었던 날 많이 힘들었을 텐데 숙소로 돌아갔을 때 혼자 있고 싶었어? 아니면 누군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누군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 위로가 필요했구나…….”

“아니, 위로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나는 화제를 돌려 그 기분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었거든. 그래야 다음에 있을 단체경기를 잘 할 수 있잖아”

 

아…….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포옹 한 번에 상대방을 포용하고 무거웠던 짐을 한 번에 털어내는 그녀는 진정한 대인배였다. 나는 정말 그녀의 앞으로가 무지 기대된다.

 

 오늘 만남을 통해서 난 느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가끔 흔들릴 때가 있다. 일, 사랑, 가정생활에서든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중간하게 비틀대지 말고 차라리 확실하게 넘어지고, 그런 다음 툭툭 털고 보란 듯이 우뚝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 차마 용서할 수 없었던 그 일도 그냥 한 번 꼭 안아주면 내가 이기는 거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힘내자.

 

 

 

ⓒ 스포츠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