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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둥지 기자단

잠실종합운동장의 추억

 

 

 

글 / 제갈현승 (스포츠둥지 기자)

 

 

         98년 4월 비가 내린 잠실종합운동장, 그 속에 치뤄진 한일전. 황선홍이 점프하여 쏜 발리슛은 일본의 골네트를 갈랐다. 그 우중전에서 황선홍의 발리골은 나에게 최고의 골로 남았다. 소년기에 보았던 그 장면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84년에 완공하여 2000년대까지 갖가지 A매치를 개최한 잠실종합운동장은 한국축구의 메카이자 성지였다


90년대 중반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2002년 월드컵개최권을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었기 때문에, 온 국민이 한국축구와 월드컵 개최를 성원해 준 시기다. 필자의 기억속에 AC밀란전, 브라질전, 한일전, 멕시코전 등 그때의 브라운관 앞에서 본 기억이 선명하다.


잠실종합운동장은 국가대표 경기때마다 7만여명을 가득 메워 열광한 장소였다. 하지만 2002년 이후 잠실종합운동장에서 A매치를 한 기록이 없다. 최신식 월드컵구장이 들어서면서 기억 속으로 잊혀져갔다. 10여년동안 잠실종합운동장은 다른 의미로 ‘대관’해주고 사용되었을 뿐이다.

 

 

잠실종합운동장 기념비 ⓒ 제갈현승

 

 

 96년도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유치전쟁 때문에 유럽팀들을 차례로 불러 친선경기를 했다. 국가대표팀의 성적이 곧 월드컵 유치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총머리’로 유명한 이탈리아 스타 로베르토 바조와 조지웨아가 이끄는 AC밀란이 방한하여 친선경기를 국가대표팀과 하였다.(당시 국가대표팀 VS 클럽팀과의 경기가 많았다)


94년 미국월드컵 결승전 승부차기에 실패하여 이탈리아를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한국팬들도 바조를 알아볼 만큼 인기스타였다. 특히 바조는 유럽인들과 다르게 종교관이 불교신자로서 언론에 화제거리를 낳았으며, 심지어 한국에서 열리는 연등행사에 참석할 정도였다. 당시 잠실종합운동장은 무려 8만명이 운집한 경기였다. 팬들은 입석표까지 구매하여 들어올 정도였다. 경기 후 바조는 한국은 월드컵유치하기에 충분하다며 추켜세웠고 당시 대표팀은 스웨덴, AC밀란, 유벤투스, 슈트트가르트를 초청하여 경기를 펼쳤다. 

 

‘황새’ 황선홍의 일본戰 발리골 ⓒ KFA

 

 

 98년도 4월 한일정기전은 프랑스월드컵을 앞둔 차범근호의 평가무대였다. 한일전에서 2연패를 당하고 있던 한국은 연패의 사슬 끊기 위해서 총력전을 펼쳤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축구는 한 수 아래라는 의식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축구의 뒤를 바짝 쫒고 있었다. 패스중심의 일본축구가 한국축구를 종종 위협하였고, 넘어설지 모른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최근의 한국과 일본의 팽팽한 라이벌관계와는 사뭇 달랐다. 98년 월드컵 최초진출과 동시에 공동개최가 확정되자 라이벌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정에 치달았던 때였다. ‘축구’만큼은 일본에게 한 수 위라는 평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상승세에 대해서 반드시 막아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 평가전에서 이상윤의 헤딩골과 황선홍의 발리골로 일본을 우중혈투 끝에 2:1로 승리했다. 90년 이후 역대 전적 5승 3무 5패. 양 팀은 호각지세였다. ‘아시아의 왕좌’를 놓고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의 싸움인 시대였다. 잠실운동장에서 미쳐 모이지 못한 팬들은 광화문에서 열띤 응원을 펼쳤다.
잠실운동장에서 일본과의 A매치 기록은 84년 9월 30일 1:2패, 85년 11월 3일 1:0승, 97년 11월 1일 0:2패, 98년 4월 1일 2:1승, 2000년 4월 26일 1:0승을 기록했다. ‘잠실벌’에서는 3승 2패로 근소하게 앞섰다.

 

99년 브라질전은 ‘원조 호나우두’가 빠졌을 뿐 사실상 정예멤버였다. 히바우두가 브라질을 이끌었으며, 왼발의 마법사는 경기 내내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다. 한국과 브라질은 90분내내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김도훈의 후반 추가시간 결승골로 사상 처음 한국이 브라질을 꺾는 대이변을 낳았다. 다음날 모든 조간신문은 김도훈의 얼굴이 가득담긴 1면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브라질을 이겼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화제였다. 당시 세계랭킹 1위 브라질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한국이 브라질을 이긴 것을 세계에 타전했고 당시 김도훈은 ‘내 생애 최고의 골’이라고 표현할 만큼 벅찬 경기였다.
브라질과의 평가전은 총 A매치기록으로는 총 4번이었고 잠실운동장에서 펼쳐진 브라질전은 두 차례였다. 한국은 97년 1:2 패, 99년 1:0 승을 기록했다.

 

김도훈의 브라질戰 결승골 ⓒ KFA

 

 

98 프랑스월드컵은 한국에게 참으로 안타까웠던 대회였다. 모두 1승을 넘어 16강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유는 97년 프랑스월드컵 지역예선전에서 워낙 대표팀이 좋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새벽 밤잠을 설치며 티비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 하석주의 선제골이 터지자 일제히 환호했으나 얼마가지 못했다. ‘백태클’금지령이 떨어진 그 대회에서 하석주의 태클이 균형의 추를 잃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균형의 추는 1:3을 가르켰다.


따라서 99 코리아컵 멕시코전은 98년의 아픔을 달래줄 절호의 기회였다.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 패하여 분루를 삼켰던 한국은 ‘리벤지’매치로서 기회로 삼은 것이다. (코리아컵은 71년부터 99년까지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국제대회를 치른 대회였다)

그 대회에서 긴 헤어스타일과 외모로 주목을 받았던 공격수가 있었는데 안정환이었다. 90년대 후반부터 K리그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A매치 5번째 출전이었던 그는 현란한 개인기와 드리블로 멕시코를 괴롭혔고 데뷔골을 기록하였다. 당시 A매치 5경기 밖에 뛰지 않았던 이 신예 선수가 향후 3년 뒤 ‘영웅’으로 기억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안정환이 활약한 코리아컵은 99년 이후로 막을 내렸다. 세계의 강호들과 대결하여 한국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한국축구가 잠실운동장에서 펼친 마지막 이벤트로 남았다.

 

잠실에서 A매치 첫 골을 득점한 새로운 스타 안정환연합뉴스

 

 

 잠실종합운동장은 90년대 한국축구와 궤를 같이 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잔디색이 누렇게 변하여 일부를 물감으로 칠하기도 한 우여곡절도 있었고 붉은 악마가 처음으로 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은 잠실종합운동장이 활용도로서 미미하다. 유럽의 경우는 경기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런던 웸블리 구장이다. 1923년에 지어진 웸블리구장은 증축 및 보수공사를 걸쳐 2007년 새로 개장하였다. 잉글랜드 A매치가 열릴 때마다 웸블리구장에서 치른다. 한국도 이제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잠실종합운동장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 여러 전문가들과 국민들의 의견을 합하여 잠실종합운동장을 ‘부활’해낼 방안을 마련해야 된다. 스포츠도 곧 역사다. 역사를 잘 보존하고 이어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소년기 때 본 브라운관의 잠실종합운동장은 ‘축구의 상징’이었다. 축구열기에 힘입어 엄청난 에너지를 뿜었던 그 경기장이 아직도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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