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야별 체육이야기/[ 학교체육 ]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이유들,

                                                                        글 / 최의창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교수)


학교체육의 정당화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종류의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하나는 경험적 이유를 제시하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 이유를 들려주는 것이다. 전자는 경험적, 사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유를 늘어놓는 것이다. 체력이 좋아진다,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기억력이 향상된다.
태도가 좋아진다 등등. 사람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유, 계량적으로 측정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유들이다.

후자는 논리적이고 개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전자는 이해하기가 쉽지만, 후자는 조금 어려우며, 전자는 우리의 경험에 근거하여
다소 명확하게 판별이 가능하다. 하지만, 후자는 어떤 개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자는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면
언제라도 반박될 수 있다. 하지만 후자는 일단 받아들여지면 반박될 수 없다.
학교체육이 교육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더 확고부동한 정당화방식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는 어떤 방식을 선호해야 할까?

학교체육의 적대자들

학교체육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학교체육의 신체적, 정신적 가치를
모조리 무시한 채,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체육의 근본적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학교 안에서의 체육은 재미도 없고 의미는
더욱더 없다고 주장한다. 체육수업 시간에 배우는 것들이 교육적으로 별반
가치 없는 내용들이고, 그것들이 실제로 학생들에게 배워지는지 조차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체육교과의 가치라고는 꽉 막힌 교실에서 있다가 확 트인 운동장에
나와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도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정도는 교과가 아닌
쉬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학교체육의 무용성을 이런 방식으로 주장한다. “학교체육에서는 인지적,
심동적, 정의적 영역의 목표를 추구한다. 체육교육은 학생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켜주고,
체력과 운동기능을 증진시키며 사회성과 감수성을 길러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이런 주장이 실지로 어느 정도나 실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체육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서 머리가 똑똑해진다든가, 전에는 미약했던 운동기능과 체력이
훨씬 좋아졌다던가, 또는 말도 안 듣던 학생이 눈에 띄게 착한 행동을 한다는 등의
결과가 나타났는지 의문이다. 그동안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학교체육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체육은 별 가치가 없다.”
대략 이런 논지이다.

학교체육의 수호자들

반면, 학교체육의 수호자들은 이런 반박을 펼친다. “체육수업 시간에 이 같은 목표가
성취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내는
연구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현장에서 실지로 목표가 성취되지 않는 이유는 제대로
가르치치 못하는 체육교사가 많기 때문이며, 만약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인지적,
심동적, 정의적 영역의 목표들을 만족할 만한 정도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과로서의 체육이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며, 다만 좀더 제대로된
체육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라고 반론한다.

 
적대자와 수호자들의 갑론을박은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치지 않다.
서로 다른 이론적 근거 위에서 행해진 연구들은 서로 상반되는 결과를 제시하고
있으며, 현장에서의 체험담도 각기 다른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런 이유로
학교체육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학교체육은 이런 상황에서 교과로서의 지위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쓸모가 있다는
증거가 확정적으로 나와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와 반대로 쓸모가 없다는
판정도 최종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기존에 이미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으므로
기득권자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소극적 정당화와 적극적 정당화

학교체육을 이처럼 경험적 방식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이 같은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이 같은 결과란 학교체육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어떤 판정을 확정적으로 내리지
못하는 결과를 말한다. “무엇 무엇이다”라는 방식으로 확정적인 결과에 의해서
근거를 정당화하는 것,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적극적 정당화”라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무엇 무엇이다”도 확실히 인정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무엇 무엇이
아니다”라고 부정적인 증거를 발견해서 정당화 근거를 박탈당하거나 부정당하지
못한 것도 아닌 상태로 정당성을 유지 받는 것을 “소극적 정당화”라고 한다.

소극적이란 말은 자신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적극적으로
부정되지 못해서 마지못해, 혹은 어쩔 수 없어서 인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학교체육의 좋은 점이 인정되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이 확실히 인정되지
못해서 잔류되는 것을 말한다.

 
교과로서의 학교체육은 적극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학교체육의 가치는 적극적
방식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이 말은 체육수업이 학교에서 행하는 교육의 한
영역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함을 말한다. 절대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지 않는 한, 학교교육은 “교육”으로서의 조건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다.
학교가 교육이라는 특별한 인간활동이 진행되는 장소가 되려면,
반드시 체육을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학교가 교육의 개념적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임을 강조하는 정당화방식이다. 학교라는 곳은 개념적으로 교육을 하는 장소이며,
교육의 개념적 의미에는 체육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내재적 정당화와 외재적 정당화

이런 방식으로 체육의 가치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물론, 학교체육의
수호자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이들은 아까처럼 어떤 경험적 연구결과를
증거로 내세우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수호자들과는 다르다.
이들은 학교체육의 가치를 개념적 또는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개념적 정당화는 어떤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고, 그 의미 자체가 가치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하려는 시도이다. 의미(개념)에 의존하여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개념적 정당화”라고 하며, 논리적 방식으로 가치를 밝힌다는 점에서
“논리적 정당화”라고 한다.

 
학교가 “훈련”이 아니라 “교육”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 한, 학교체육의 가치를
개념적으로 정당화하면 체육교과는 그 의미의 한 부분으로 학교교과의 하나로서
정당한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즉, “체육은 교육의 한 부분이다.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체육을 가르쳐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다소 풀어본다면, “교육은 그 의미의 한 부분으로 체육을 포함하고 있다.
학교는 그 개념상 교육을 하는 곳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말해서, 학교는 반드시
체육을 가르쳐야 한다.” 개념적 정당화는 내재적 정당화라고도 불리운다.
그것은 정당화하려는 대상에 붙박혀 있는 의미 안에서 그 가치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의미 바깥의 것에 의존해서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노력은 외재적
정당화라고 한다. 체육은 내재적 정당화에 의해서만 학교교과로서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 스포츠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