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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왜 영국 학교는 스포츠 교육을 중시했을까?


글 / 옥 광(충북대학교 체육학과 조교수)


 

근대 올림픽을 부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쿠베르탱이었다는 사실은 꽤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근대올림픽을 부활하고자 했던 이유와 초기 올림픽 경기의 조직 및 운영에 영향을
끼친
사고 중 하나가 바로 영국의 퍼블릭 스쿨에 기인한다고 한다면 많이들 의아해할 것이다. 

근대 스포츠사의 가장 중요한 획을 그은 근대 올림픽의 부활이 영국의 퍼블릭 스쿨과 무슨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일까?


귀족 출신 성분의 쿠베르탱은 어린 시절부터 영국의 교육적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그는 테누의 《잉글랜드에 관한 노트(Notes on England)》, 토마스 휴즈의 《톰 브라운의 학창시절
(Tom Brown's School Days)》등을 읽고 영국 퍼블릭 스쿨의 스포츠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후 ‘자유와 스포츠’ 라는 스포츠 교육사상의 하나의 원형을 구축하고 스포츠 운동에 주력하였고,
결국 1894년 스포츠를 통해 전인적 발달을 지향하고 스포츠 정신을 바탕으로 인류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상인 올림피즘(Olympism)을 주장하며 1896년 근대 올림픽의 서막을 올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남길 외, 2008: 139-140).

그렇다면 그가 주목한 19세기 영국 퍼블릭 스쿨의 교육과정에서 스포츠를 중시한 이유와 이것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짚어 보는 것은 세계 스포츠사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근대 스포츠 사상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근대 영국의 역사에서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은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며, 그 교육 과정에서
스포츠가 활용되었다는 점은 영국사를 넘어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영국사에서 퍼블릭 스쿨이 출현한 시점은 12세 초엽부터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중상류층들의 자제를 국가가 지원하여 교육하는 국립교육 기관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그 수가 218개교가 될 만큼 급격히 증가했고, 교육대상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신흥 부르조아 계층들의 자제들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로부터 일정한 보조금을 받는 동시에 학부모들로부터 높은 금액의 수업료를 받아 운영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는 국가나 지방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여 사립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당시 명문학교, 예컨대, 그레이트 퍼블릭 스쿨(Great Public School)로 간주되던 학교는
1861년 왕립 클라렌톤 퍼블릭 스쿨 위원회에서 선정한 9개교를 말하는데 여기에 이튼(Eton),
해로우(Harrow),
럭비(Rugby),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슈루즈버리(Shrewsbury), 윈체스터
(Winchester),
차트하우스(Chaterhouse), 세인트 폴스(St. Paul's), 머천트 테일러스(Merchant Taylor's)
학교들이 포함되었다.

영국의 퍼블릭 스쿨에 스포츠가 도입된 이유와 발달 배경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퍼블릭 스쿨에 스포츠가 도입된 것은 스포츠를 애호하던 상류 계급의 전통이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이전까지의 왕실과 상류계층의 스포츠 애호 전통이 계승되어 경마, 크리켓, 골프와 같은
종목들은
18세기 말부터 점차 전국적인 조직체를 결성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퍼블릭 스쿨은 일부 귀족과 중산계급, 그리고 신흥 부르주아의 자제들이 수학하던 특수한
교육기관이었기에
각종 스포츠가 사회문화적 환경 특히 계급적 환경에 의해 학교를 중심으로
확산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퍼블릭 스쿨에 스포츠가 도입된 직접적인 배경은 스포츠가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위한
긍정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당시 사회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퍼블릭 스쿨의 교육은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라틴 및 그리스 고전 중심의
경직된 교과과정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학생들은 그러한 교육의 틀 속에서 욕구의 분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사들은 각종 게임의 참여가 난폭한 학생들의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Mangan, 1987: 142)

결국 1840년대부터 말보로우와 업핑엄을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각종 스포츠를 교육 체계 속에
공식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스포츠를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묘약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퍼블릭 스쿨은 기숙학교 즉, Boarding School 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활동 범위가 교정내로 제한되어
있었고, 스포츠의 도입은 이러한 환경에 매우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19세기 영국 퍼블릭 스쿨에서 지향했던 스포츠 교육의 목적은 애슬레티시즘(athleticism)
즉, 운동애호주의의 체계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슬레티시즘의 이념적 체계는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목적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신사도(gentlemanship),
강건한 기독교(Muscular Christianity), 제국주의적 충성심(imperial royalty)의 함양을 목표로 한 것
이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용어를 반지성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조잡하고 병리학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19세기 중엽부터 각종 스포츠 종목들은 퍼블릭 스쿨의 중요한 교육 영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점차 그 체계가 잡혀갔다.

교장, 교사, 기숙사 감장들은 프리펙트 시스템(prefect system), 상급생들이 하급생을 관리하던
기숙사의
조직체계와 모니터 시스템(monitor system)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게임에 참여시켰으며,
스포츠 참여를 통한 교육적 이상을 구현해갔던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결국 공명정대성, 남성다움,
협동심,
통솔력 등과 같은 목적 개념 아래 진솔, 헌신, 정직, 투지, 신체적 탁월성, 성실, 자기신뢰, 절제,
명예,
복종심, 스파르타적 근성, 희생, 단결 등과 같은 자질을 함양하는 지렛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애슬레티시즘에는 제국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도 내재되어 있었다.

영국이 20세기 초까지 제국주의 선두주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
특히, 워털루 해전에서 승리한 181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영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그 절정에 달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한 영역이 된 학교 스포츠도 예외일 수 없었다.
스포츠 참여를 통한 신사도의 함양이라는 도덕교육의 목적과 강건한 기독교 육성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이 결합된 이데올로기가 바로 애슬레티시즘이었는데(하남길, 1996: 141),
이 강건한 기독교도의 육성이라는 개념은 곧 제국주의적 기독교도의 육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사도나 기독교주의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있던 다윈주의(Darwinism)와
융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애슬레티시즘은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이념이 동시에
내재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슬레티시즘은 매우 역설적인 이데올로기로 19세기 영국 스포츠의 조직화와 확산은
결국 공명정대한 영국 신사의 육성 목적과 기독교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강건한 영국인의 육성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실시한 스포츠 교육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지니며, 퍼블릭 스쿨은
사회사적으로 볼 때 귀족 스포츠와 민중 스포츠를 통합하는 역할
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테니스, 크리켓, 폴로와 같은 종목은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고, 축구는 지배계급으로부터
시종 금지를
당하던 민중의 저항적 유희였으나 퍼블릭 스쿨에 전통의 상류계급과 신흥 부르주아
자제들이 함께
수학하면서 계급적 통합을 통한 새로운 신사의 유형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옛 귀족 스포츠와
민중 스포츠를 중산계급 사회의 문화 또는 교육매체로 정착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영국의 스포츠 교육은 각종 팀 스포츠가 정규 교육과정에 편성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고, 스포츠의 조직화와 발달에 촉매적 작용을 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교육 및
여가문화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9세기 영국의 애슬레티시즘은 강건한 기독교 신사의 육성을 목표로 한 이념이었으나
기독교주의와 제국주의가 결합된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패러독스(paradox)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스포츠문화 애호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은 영국의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팽창의 결과로
수출된 것이며 정치적인 상징성을 띠며 변화한 스포츠는 문화적 양상의 부산물임과 동시에
결속제와도 같은 도구적 작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하남길(1996). 영국 신사의 스포츠와 제국주의. 서울: 21세기교육사.
하남길 외(2008). 체육과 스포츠의 역사. 진주: 경상대학교출판부.
Mangan, J. A. & Walvin, J. et al. (1987). Manliness and Morality.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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