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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체육인과 조선시대 무인들의 공통점

글 / 나영일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


 

조선시대는 양반사회!

500년간 지속된 조선시대는 양반사회였다.
문반과 무반으로 나누어지는 양반제도는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다.
문인에 비해 무인의 대우와 평가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렇게 낮지 않았다.
그동안 문인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문인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과 생각이 너무 높아서 무인은 천시되었다고 잘못 생각했을 뿐이다.

과거시험으로서 문과와 무과가 실시되었는데,
공식적으로 3년에 한번 문과는 33명, 무과는 28명씩을 선발
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국방의 상황 그리고 경사가 있었을 때 과거시험은 때때로 실시되었고,
어떤 경우에 만과(萬科)라고 하여 만명이 넘게 많은 인원을 뽑아 부실하게 운영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무과는 약 200여회가 실시되었고, 합격자는 모두 12만명 정도였다.
그리고 하급무인들을 선발하는 다양한 시험제도가 있었다.

1만 시간의 법칙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의
'아웃라이어(Outliers)'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의 2장 제목을 '1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붙였다.
남보다 뛰어난 사람을 ‘아웃라이어’라고 하는데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분야건
1만 시간의 땀 흘리는 훈련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만 시간은 매일 하루에 3시간 씩 10년 동안을 몰입해서 훈련을 하는 시간이다.
성공의 기회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스포츠분야이건 소설가건 피아니스트건 보통 어떤 일에 빠져
10년 정도를 갈고 닦으면 그 분야에서 나름대로 전문적인 기술이나 안목을 갖춘 사람이 된다고 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위대한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은 1만 시간의 피나는 연습시간을
투자한 사람들
이다.
조선시대의 무인들도 역시 그 이상의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조선시대 무인들은 2-30년을 공부하고 무예를 닦았으며,
이론과 실기가 겸비된 사람들이었다.


문과와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의 나이를 보면 평균적으로 30세 후반이었다.
이순신장군은 28세에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그 후 32세에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무려 4년이 지난 다음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처럼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당시의 무인들은 이론과 실기에 모두 능했다. 이론으로는 사서오경이나 무경칠서와 같은 병법서와
유교경전을 알아야했고, 실기는 주로 무예시험 종목인 활쏘기와 말을 타고 활을 쏘거나
폴로와 비슷한 경기인 격구(擊毬) 등을 시험보아 문무를 고루 갖춘 인재를 선발하였다.

실기시험은 9등급으로 채점하였다.

조선시대의 무예 시험은 요즘 대학수학능력시험처럼 9등급으로 평가하였다.
당시의 평가는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에서부터
하상(下上), 하중(下中), 하하(下下)까지 9단계별로 점수를 부여
하여 실기 기능을 채점하였다.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위해서는 상상의 점수인 1등급을 받아야 했다.
관서지방에서 실시한 예비 과거시험 결과를 보면, 평양한량 전응린(田應隣)은 월도(月刀)가 상상,
농창(弄槍)이 상상, 쌍검(雙劒)이 상상, 편추(鞭芻)가 육중(六中)으로
무과최종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하급 무인들은 물시계를 이용하여 달리는 능력을 측정하는 주(走)라는 시험과
력(力)이라고 하는 시험을 보았다.
이들은 특히 오늘날의 배근력 시험에 해당하는 여력(膂力)이 좋아야 했다.
무인들은 보통 모래 15-18말(斗, 약 100kg)정도를 들 수 있을 정도의 힘 쎈 장사들이었다.



정조대왕은 명궁이면서 에티켓이 있는 임금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무인뿐만 아니라 임금의 무술실력도 대단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도 명궁이었고 격구의 대가였다.
특히 정조대왕은 활쏘기를 자주 하였는데, 그의 실력은 거의 신궁의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는 50발을 쏴서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모두 10번이나 되고,
100발을 쏴서 98발을 맞추기도 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술실력이상으로 예의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실력자였다.
그는 활쏘기를 하여 10순(5발을 1순이라고 한다)에 49발을 맞히고 나서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부러 1발을 맞추지 않은 것은 스포츠경기를 하면서 타인에 대한 새심한 배려를 한 것으로
그가 예의와 에티켓을 지닌 젠틀맨이었음을 말해준다.

무인들의 실력이 낮아서 나라가 망했다.

구한말인 1890년, 지금의 평안도지역의 아이진(阿耳鎭)에 있는
군병들의 활쏘기와 조총 사격기록을 기록한 《아이진시사방득중성책(阿耳鎭試射放得中成冊)》에는
지금의 군대 직급으로 중대장급인 기총(旗摠), 소대장급인 대장(隊長)의 장교를 비롯하여
일반 병사 등 총 102명의 기록이 모두 불합격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이처럼 상급직급자인 기총부터 하위 포수까지 모두 불합격된 기록을 보면
당시의 군병들의 활쏘기와 조총의 실력이 형편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헤이해진 기강과 국력의 쇠퇴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였다.
그결과 조선은 일제에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체육인과 조선시대 무인들은 닮았다.

전쟁이 거의 없어진 요즘의 세상에서는 올림픽이나 세계대회가 총성없는 전쟁을 대신하기도 한다.
자국의 명예와 국력의 척도가 메달수에 비견되면서 체육인들은 조선시대의 무인과 같은 역할
하고 있다. 체육인과 무인들은 너무도 닮았다.

조선시대에는 왕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과 무를 겸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성공의 매직넘버인 1만 시간 이상을 훈련에 매진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무인들의 체력진단과 평가방법은 과학적이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와서 무인은 무만, 문인은 문만 일삼다가 그것마저 소홀히 하여 나라가 망했다.

운동선수가 오직 운동만 하고, 일반인이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오늘날의 체육계의 현실은  비정상적이다. 체육인이 문과 무의 실력을 겸비할 때, 진정한 인격체로서 이 사회에서 실력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체육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뀌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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