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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귀족계급과 서민들의 신체문화 차이는?

글 / 하웅용(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체육사학에서 가장 비중 없는 부분은 서양의 중세일 것이다.
통념적으로 중세의 신체문화는 다른 문화처럼 별 볼 것 없는 암흑기로 치부되니까!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치부하기에는 중세의 기간이 너무도 길다.
중세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 말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인 15-16세기에 이르는
1천년 이상의 긴 기간이기 때문이다.
천년동안 모든 이에게 절제된 수도원의 생활(종교적 생활양식)이 강요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신체문화는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중세에도 다양한 신체문화가 존재하였고 즐겼다.
중세의 신체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편견은 반복적 학습에서 온 “학문적 게으름”인 것이다.
그럼 중세 신체문화의 진실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자.


왜 중세 신체문화를 암흑기라고 했는가?

중세를 이해하려면 먼저 기독교를 이해해야만 한다.
종교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중세에서는 “영혼은 고귀하지만 신체는 천하다”는 생각으로
놀이를 포함한 모든 신체문화를 “죄악이며 사간낭비”라고 타부시 하였다.
이러한 중세의 신체문화적 상황을 카이와(Roger Caillois)는 중세에서의 놀이는
구속 받지 않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과 달리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쾌락적인 엉뚱한 짓과 헛된 기분전환에 불과하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를 신체문화의 암흑기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광의적인 측면에서 중세 신체문화를 평가한다면 암흑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체문화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가지는 놀이의 본능을 어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호이징가에 의하면 “놀이를 즐기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이며,
더 나아가 “문화행위 자체에는 놀이적 속성이 있다”고 하였다.
호이징가의 이러한 주장을 해석하면 "
인류는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놀이나 신체활동을 지속적으로
즐겨왔으며, 놀이에 대한 욕구는 본능이며, 중세에도 예외가 아닐 것"
이라고 라고 할 수 있다
.

중세에서 즐겼던 신체문화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가?

귀족계급의 신체활동

중세는 계급사회였기에 신체문화 역시 귀족과 기사의 상류계급과 서민이 달랐다.
상류계층의 대표적인 체육활동으로는 수렵, 토너먼트, 쥬스트, 과녁맞추기 등이 있었다.
또한 12세기 들어오면서, 프랑스의 귀족들은 구기관(球技館)에서
주드뽐(Jeude paume, 테니스의 일종)을 즐겨하기도 했다.
베브렌(T. Veblen)에 의하면 상류계층은 하류계층과 사회적인 구분을 두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과시적인 행동이나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를 하였다고 한다.
Veblen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 상류계층의 체육활동은 대표적인 “과시적인 소비형태”라고 볼 수 있다.
상류계층이 즐겼던 수렵, 각종 마상경기, 주드뽐 등 모두가 일반 시민이나 농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수렵은 주로 개나 매를 이용하여 행해진 신체활동으로
중세 귀족들이 가장 애호했던 신체활동이었으며, 상류계층의 사교장이었다.
다른 신분의 사람들은 허가되지 않아 귀족 남성만의 여가였다.
또한 수렵은 농가에 피해를 입히는 동물을 사냥한다는 명백한 효용의 가치가 있는 신체활동이었다.
양어장을 공격하는 수달들이나, 양치기 무리에 덤벼드는 늑대들을 퇴치하는 것은 영주의 일에 속했다.
목장 평원을 넘어서 밭의 말뚝(펜스)을 넘나들기도 하고,
사냥감을 몰기 위해서 불을 질러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어 농부들은 탐탁히 여기지 않았지만,
여우나 멧돼지가 농작지를 짓밟는 것보다는 나았다.



유럽중세 기사의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시작되어 궁전문화의 영향으로 화려하게 개최되었던
토너먼트(Tournament), 쥬스트(Joust), 과녁맞추기(Quintus)는 중세를 대표할 수 있는 경기이다.
단체 경기인 토너먼트, 1대1경기인 쥬스트, 정확한 과녁을 맞히는 과녁맞추기는
대부분 기마에 의한 모의 전술로써 행하여진 기마창술경기라고 할 수 있다.

                                                                     토너먼트

                                                                       쥬스트


                                                                주드뽐 경기(구기관) 

 

수렵이나 각종 마상경기는 군사훈련의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중세 후기부터는 그들의 여유시간에 행하는 레저로 변천하게 되었으며,
주드뽐 역시 다른 계급이 행하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따르는 종목이었다.
즉 이러한 신체유희는 상류계층만을 위한 활동으로써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체육사에서 주로 다루었던 수렵, 마상경기, 주드뽐 등은
중세를 살았던 일부 사람들만의 신체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중세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시민이나 농민들의 신체활동은 전무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서민들의 신체활동

중세 후기에는 중세 시민과 농민들도 비록 종교적, 시간적, 경제적인 이유로
상류계층보다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신체활동을 즐겼다.
서민들은 그들의 출신지역의 유희나 댄스와 여러 형태의 걷기, 뛰기, 던지기 등의 민속적인 놀이를 즐겼다. 이러한 신체활동은 도시별로 독자적인 시민제라든가 구경거리, 장터모임과 같은
대규모 행사의 일환으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술(soule)이나 구주희와 같은 공놀이도 즐겼는데, 중세에 있어 공놀이는
도시의 광장이나 도로 또는 도시와 연결하는 공간에서 이루어 졌다.
당시 공놀이가 지금의 축구처럼 일정한 규칙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한 종류가 아닌 여러 형태의 볼게임(ball games)이 행해졌다.

                                                                       술 게임


구주희와 오늘날 볼링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병을 쓰러뜨리는데 쓰이는 도구에 있었다.
사람들은 병을 쓰러뜨리는데 공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막대기를 던져서 병을 쓰러뜨리기 때문이다.
이 막대기는 길이가 1m이상이 될 수도 있었고, 굵기도 상당했다.
평민에게는 나무 공을 만들기보다 막대기를 얻는 것이 경제적이고 쉬웠기 때문에
막대기를 사용하는 구주희는 큰 인기를 누렸다.


                                                                 다양한 공놀이

중세농민들은 봄의 축제, 5월 축제, 가을의 감사절 축제 등을 통하여 다양한 신체활동을 즐겼다.
농민들은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양한 춤, 레슬링, 달리기, 도약, 던지기 등의 민족 놀이를 가졌다. 예를 들어 도약경기 종목에는 제자리높이뛰기, 삼단높이뛰기, 사단 높이뛰기,
뛰어서 밑으로 내려가기 등이 있었으며, 던지기 종목에는 돌 던지기, 봉 던지기, 해머던지기,
단도던지기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놀이들은 후에 근대 육상경기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세 신체문화는 근·현대 신체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중세의 신체활동으로 흔히 떠올려지는 것들은 기사들의 군사훈련에서 비롯된
쥬스트나 토너먼트 등의 마상경기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귀족은 물론 일반 민중들이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다양한 신체유희를 즐겼고,
이러한 신체유희들 중에는 20세기까지 그 인기를 누리는 것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세의 도시와 농촌에서 즐겨했던 신체활동들이 육상, 테니스, 게이트볼, 양궁, 펜싱, 볼링 등과 같은
근대스포츠로 발전하는데 모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서양 체육사의 발달과정을 연속선상에서 볼 때
중세체육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체문화를 계승했고 근·현대 체육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