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조준호(인천전문대학 사회체육과 강사)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은 1980년대 한국만화사의 최고 걸작이다.
이 만화는 아직도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될 만큼 사람들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또한 이 만화를 보면 한국프로야구의 이단아 삼미슈퍼스타즈를 연상하게 한다.
그 이유는 뭘까?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2년 창단된 인천 최초의 프로야구팀,
삼미슈퍼스타즈를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미는 최고의 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삼미의 향수는 오래도록 쉽게 잊혀 지지 않는 걸까?
우수한 선수들이 많아 매번 우승을 하는 팀은
왠지 단점이 없어 보여 인간미를 떨어뜨리고, 중간순위를 하는 팀은
뚜렷한 매력이 없어 너무 평범해 보인다.
사고치는 꼴찌라도 노력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더 정이 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어제도 지고, 오늘도 지고, 내일은 이길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으로
모두가 안쓰럽게 지켜보던 삼미는 야구도시 인천의 명성을 무색하게 한 외인구단이었다.
야구도시 인천은 한국최초의 야구 시발지이며, 광복이전 1920년부터 활약한
‘한용단’과 ‘고려야구단’, 사회인야구의 효시가 된 ‘전인천군’ 등
최고의 야구팀이 활동하던 야구도시다.
그리고 1960,70년대에는 고교야구 최강팀 ‘동산고’와 ‘인천고’가 야구도시의 명성을 이어갔다.
이렇듯 영광의 야구도시 인천을 모두가 ‘구도인천(球都仁川)’이라 불렀다.
‘구도인천(球都仁川)’의 첫 프로야구팀 삼미슈퍼스타즈,
우리 모두는 바지위에 팬티 입는 슈퍼맨을 미친 듯이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부산갈매기’가 사직구장에서 부산 팬에 의해 우렁차게 합창되고, ‘목포의 눈물이’ 광주구장에서
구성지게 불러졌을 때, 인천구장에서는 ‘김트리오’의 ‘연안부두’가 목 터지게 불러졌다.
왜 이 노래를 들으면 짜릿한 눈물샘을 자극하는지,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의 이단아 ‘삼미 슈퍼스타즈’를
아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삼미의 역사는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떼쓰는 막내아이로 태어난
삼미는 제임스 딘처럼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고, 그처럼 너무 젊은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났다.
삼미슈퍼스타즈는 한국프로야구사에 진정한 슈퍼스타였다.
1. 왜 팀 이름이 슈퍼스타즈?
아직도 삼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촌스러운 슈퍼맨 모습과
마스코트 원더우먼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삼미 창단의 바로 그 중심에 김현철 회장이 있었다.
김회장은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에 재학 중일 때
미식축구에 매료되었는데 거기서 슈퍼스타즈란 이름을 가져왔다고 했다.
촌스럽지만 정이 가는 그 이름 슈퍼스타즈, 자꾸 듣다보면 중독된다.
2. 자발적인 삼미의 창단으로 인해 한국프로야구는
정상적인 출범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프로야구 출범 시 각 지역의 모교애 30%,
향토애 70%라는 지역별로 안배한 창단계획을 세운다.
인천에서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기업들을 물망에 오르게 되나
기업들의 사정으로 인하여 여의치가 않자 인천지역을 출범에서 제외시킨다.
결국 한국 프로야구는 리그전도 어려운 5개 구단만으로 절름발이 출범을 계획하게 되지만,
이때 삼미그룹이라는 다소 생소한 기업의 김현철 회장이
프로야구 출범 준비위원회의 정식모임 6시간 전에 전화를 걸어 창단 의사를 밝힌다.
이제 인천 만석동에서 기업을 일으킨 삼미가 인천의 프로야구팀을 만든 것이다.
자발적인 삼미의 뒤늦은 등장으로 한국프로야구는 정상적인 출범이 가능하게 되었다.
3. 삼미는 창단 원년 단 한명의 슈퍼스타도 없이 단지
‘팬 사랑을 받는 팀’이 목표였다?
1982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가 있었다.
“삼미슈퍼스타즈,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스타플레이어가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전 국가대표의 딱지가 붙은 선수가 없다. 굳이 이 팀의 애칭 슈퍼스타즈에
걸 맞는 이를 찾는다면 사령탑 박현식 감독뿐이다. 에이스가 없어 타격위주의
게임을 운영하며, ‘팬사랑 받는 팀’을 목표로 최하위 탈피에 주력하겠다.
프로 품위 지켜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프로팀의 목표는 ‘승리’, 그리고 최종 ‘우승’일 것이다.
야구단의 승패는 소비재 업체를 보유한 회사의 매출과 직결되지만,
삼미는 이러한 소비재 업체도 없었으며 그저 최선을 다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팬 사랑을 받는 팀’이 되고자 했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한 프로야구팀 아니었을까?
4. 삼미는 창단 첫해 최악의 기록을 남겼으나,
1983년 재일동포 장명부를 비롯한 우수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진정한 외인구단이 되었다?
삼미는 한국야구사에 아직도 깨지지 않을, 어쩌면 영원히 깨지지 않을 영욕의 기록을 남긴다.
삼미는 원정경기 최다 21연패, 한경기 최다 20실점, 특정 팀 상대 최다 16연패,
후기리그 최저승률 0.125, 18연패 등 치욕스런 기록들이 있다.
또한 개인최다 30승, 시즌 최다 출장투수 60게임, 시즌 최다 선발투수 44게임,
팀 최소 투구 80개, 최다 완투 56게임 등 장명부의 활약은 삼미를 우승후보로 도약시킨다.
삼미는 전년도 꼴지팀에서 하루아침에 우승후보로 성장,
왜 삼미가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5, 삼미슈퍼스타즈에는 본받을 만한 철학이 있다?
삼미에는 장명부와 감사용 등 유명한 선수들이 있다.
한 시즌 30승의 최고투수 장명부, 패전전문 마무리 투수 감사용은
극과 극을 달리는 선수들이었지만 그들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장명부는 30승의 원동력을 ‘無二一球’의 정신(KBS스페셜, 2005.10.16)을 강조한다.
‘오직 하나의 투구’라는 정신으로 하나하나 투구한 것이
바로 그의 30승 신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감사용도 “1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고 꼴찌가 있어야 1등이 있음을 말하며,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도전하는 정신자세가 가장 중요하다(이코노믹리뷰, 2005. 4.27)”고 강조한다.
1등에게도, 꼴등에게도 우리에겐 모두 배울 교훈이 있다.
삼미는 비록 꼴지 팀의 대명사였지만 가끔 강팀에게 큰 점수 차로 승리하는
‘도깨비팀’이기도 했다.
삼미는 1985년 모기업의 경영악화와 팀의 성적부진으로
시즌 중 결국 청보그룹에 매각되었다.
삼미는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팀 창단으로
한국야구계에 선구자적 귀감이 되었다.
또한 삼미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있어서 진기한 기록들을 많이 남기며
초창기 한국프로야구 정착과 발전에 기여한 진짜 슈퍼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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