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종훈
2017년 10월 18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 루이리장허회 호텔에서 열린 리민배 세계 신예 바둑최강전 결승에서 중국 바둑 랭킹 1위 커제 9단이 쉬자양 5단에게 211수만에 흑 불계승을 거두며 왕좌의 자리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한국 기사들은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전원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현재 세계 바둑 랭킹 20위권에는 중국 기사 13명, 한국 기사 6명, 일본 기사 1명이 올라 있다. 판세는 중국 바둑의 강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 바둑은 약세를 띄고 있다.
한중일 판도는 그동안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일본은 1990년대 한국과 중국에 조금씩 형세가 기울어지기 이전에 전 세계에 바둑문화를 전파하는 바둑 선진국이며, 실력에서 한국과 중국보다 강세였다. 1924년 발족을 시작으로 1939년 프로기전을 확립하고 바둑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로 인해 일본 바둑의 위상은 한국과 중국보다 먼저 세계의 정점으로 앞서나갔다. 일본의 바둑은 현대 바둑의 모태이며, 한국과 중국의 전통 바둑과 달리 자유 기법에 의한 포석으로 시작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정석과 다양한 이론을 개발했으며, 과정보다는 승패에 가치를 더욱 부각시켜 실리 바둑을 두었다.
일본은 바둑 기사를 예술가로 인정하는 분위기 때문에 바둑 기사를 목표로 하는 어린아이들과 청년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육성시키는 시스템이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 바둑은 1970~1980년대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가토 마사오, 이시다 요시오, 후지사와 슈코 등 걸출한 바둑 스타들을 배출시키면서 강세를 이어갔다.
한국 바둑은 1990년대 이후 세계바둑의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 바둑은 일본, 중국과 달리 공격 성향이 가장 특출한 유형이며, 이론보다는 전투적이고 실전적인 힘이 넘치는게 특색이다. 한국 바둑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국내파 서봉수 9단과 일본 유학파 출신인 조훈현 9단의 등장부터다. 두 바둑 기사의 등장으로 조ㆍ서 시대가 열렸고, 1988년 최초의 세계기전인 응씨배에서 조훈현 9단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계 바둑의 판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 후 조훈현 9단의 제자인 이창호 9단이 등장하면서 한국바둑이 독주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창호 9단은 1992년 동양증권배에서 최연소(당시 나이 16세) 세계대회 우승 기록을 경신하면서 바둑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외신에서는 ‘불가사의하다’, ‘외계 고수’, ‘전대 고수’로 불리며 한국 바둑의 위상을 높였다. 이후 이세돌 9단의 합세로 바둑계에서 한국의 강세는 꺾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2000년대 이후 감추었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 중국 바둑이 강세를 띄었다. 중국 바둑은 예로부터 바둑을 하나의 예술로 여겨 승패에 상관없이 변화무쌍한 대국에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다 일본과의 바둑 교류를 통하여 이론을 중시하고 승패를 존중하는 현대바둑으로 전환했다. 오늘날 중국은 바둑을 두뇌 스포츠로 인정했다. 중국은 바둑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많은 투자와 관심을 통한 노력으로 혁신적인 방법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세계 랭킹 20위권에서 13명의 중국 바둑 기사가 있고, 최근에 업그레이드된 알파고와의 대결 이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세계 바둑 랭킹 1위 커제 9단이 독주함으로써 오늘날 중국 바둑의 전성기를 이루어 냈다. 한 중 일 바둑 시대는 ‘화무십일홍’으로 비유할 수 있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뜻이다. 시대에 따라 한 중 일 바둑계의 판도는 엎치락뒤치락하며 형세가 바뀌고 있다.
다시 한 번 찬란했던 한국 바둑의 시대가 부활한 것인가. 바둑 인재의 육성과 투자, 많은 관심이 모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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