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조승윤
2015-2016 한국프로농구 외국인 제도에 큰 변화가 생긴다. 두 명의 선수를 뽑는 건 똑같지만 그 기준이 달라진다. 193cm를 기준으로 장·단신 선수를 한 명씩 뽑아야 한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높이의 기대는 크다. 하지만 KBL 역사를 돌이켜보면 뛰어난 활약을 했던 단신 선수들도 있다. 이들은 탁월한 개인기와 화려한 플레이를 앞세워 프로농구의 흥행에 큰 기여를 했다. KBL을 뜨겁게 달군 역대 5명의 단신 선수들을 집중조명한다.
야반도주의 아이콘 ‘버나드 블런트’
“버나드 블런트와 같은 포워드를 찾고 있다.” 유재학 감독이 2014-2015 시즌을 마치며 다음 시즌 외국인 선수 선발에 대해 한 말이다. ‘만수’ 유재학 감독이 언급할 만큼 블런트의 활약은 대단했었다.
▲버나드 블런트의 모습(사진=KBL 공식홈페이지)
블런트는 KBL 출범 첫해인 1997년부터 두 시즌 간 LG에서 활약했다. 평균 37분을 뛰며, 27.69득점, 7.9리바운드, 5.1어시스트 기록했다. 특히 190cm도 안되는 신장이지만 첫해에는 리바운드를 평균 9.2개나 잡을 만큼 적극적이고 탄력적인 선수였다. 특히 1998-1999 시즌에는 한 경기에 17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기도 했다.
블런트를 기억하는 팬들은 그의 다재다능함을 그리워한다. 트리플더블을 4회나 기록할 만큼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블런트가 뛰었던 두 시즌 동안 창원LG는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블런트의 코트 밖 행동은 실력과는 달라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1999-2000시즌을 앞두고 무단이탈과 연습 불참을 일삼더니 돌연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시즌을 구상 중이었던 LG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코트 안에서 최고의 선수였지만 코트 밖에서 보여준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아쉬움을 남기고 퇴장했다.
스프링 탄력 ‘제럴드 워커’
제럴드 워커는 최고의 포인트 가드였다. 184cm라는 신장은 현재 KBL 외국인 선수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워커가 포인트 가드로서 보여준 활약은 그가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팀에 필요한 외국인 선수라는 것을 증명했다.
1997년 안양SBS에 입단한 위커는 그동안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을 많이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었다. 화려한 드리블에 의한 돌파와 슛, 번뜩이는 노룩 패스, 포인트 가드의 덩크 등은 농구 팬들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제럴드 워커의 모습(사진=KBL 공식홈페이지)
워커는 한국에서 활약한 두 시즌 동안 평균 36분간 23.64득점 6.6리바운드 5.8어시스트 3.2스틸을 기록했다. 포인트 가드임에도 불구하고 20득점 이상을 기록했고, 평균 스틸이 3개가 넘을 만큼 가로채기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97년 인천대우와의 경기에서는 한 경기에만 14개의 스틸을 기록할 정도로 스틸에 있어서는 최고의 선수였다.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제럴드 워커는 아쉽게 KBL에서 오래 활약하지는 못 했다. 팀플레이보다는 개인기에 의한 경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팀플레이를 우선시하는 KBL의 특성상 그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무리한 개인기나 패스 등 경기의 흐름을 깨는 나 홀로 플레이가 문제가 됐다.
화려한 덩크를 수놓다 ‘알렉스 스케일’
속공은 선수들의 화려한 덩크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이러한 팬들의 기대를 가장 잘 충족시킨 선수 중
한 명이 2004-2005 시즌 서울삼성의 알렉스 스케일이다.
▲1:1을 시도하고 있는 알렉스 스케일(사진=삼성썬더스 공식 홈페이지)
스케일은 대체선수로 KBL 무대를 밟은 만큼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팬들은 그에게 ‘서태웅’이라는 별명을 지어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스케일은 한국 무대에서 활약한 총 49경기 동안 평균 33분을 뛰며 21.8득점, 4.9리바운드, 3.6어시스트, 1.9스틸을 기록했다. 기록에서도 그의 활약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가 팬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만화에 나올듯한 화려한 덩크슛이었다. 187cm의 단신이지만 특유의 탄력을 이용한 그는 올스타전에서나 볼법한 덩크슛을 여러 차례 선보였다. 가끔씩 무리한 개인기나 슛으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재밌는 농구를 선보인 선수로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아쉽게도 알렉스 스케일은 대체 선수로 활약한 2004-2005 시즌 이후에는 볼 수 없었다. 그의 NBA 진출에 대한 도전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NBA섬머리그 등을 통해 NBA에 도전한 그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1경기를 뛰었고 이후 유럽과 중국리그 등에서 활약하며 KBL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수비장군 '로데릭 하니발
KBL 무대를 밟는 외국인 선수들은 대부분 자신감이 넘치는 나머지 개인플레이에 집중하고 수비 같은 궂은일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선수가 바로 로데릭 하니발이었다.
1999-2000 시즌에 서울SK에 입단한 하니발은 외국인 선수치고는 단신인 193cm였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수비력으로 4시즌 동안 한국 무대에서 활약했다. 특히 서울SK는 하니발의 활약으로 1999-2000시즌 창단 첫 우승을 경험했다. 반면 하니발의 부상이 있었던 2001-2002시즌 그의 부상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우승 트로피를 놓쳤다. 이에 당신 사령관이었던 최인선 전 감독도 하니발이 있었다면 우승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하니발의 영향력이 컸었다
▲드리블 돌파 중인 로데릭 하니발(사진=동아일보)
하니발에 대해 최인선 전 감독은 “하니발이 슈팅 가드지만 탄력 있는 플레이로 스몰포워드, 파워포워드 어느 포지션이든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개인플레이를 우선하는 다른 외국인 선수들과 달리 팀플레이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살림꾼이다.”라며 칭찬할 정도로 하니발은 팀의 상황에 따라 희생할 줄 아는 선수였다. 뿐만 아니라 공수에 걸친 멀티플이어 능력으로 팀에 필한 위치 어디에서든 뛰는 것이 가능했다. 심지어 수비에서도 포인트 가드인 이상민과 매치 업을 할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그러나 하니발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아쉬움을 남긴 선수 중 한 명이다. 2001-2002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심판을 밀쳐 퇴장 당했고, 퇴장 돼서 나가는 도중에 계시기를 발로 차고 집어던지는 등 소동을 부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후 2003-2004시즌 서울 삼성에서의 활약을 끝으로 KBL 생활을 마무리했다.
아름다운 이별 ‘헥터 로메로’
공식 신장 193.8cm인 헥터 로메로는 2005-2006시즌 창원 LG에 입단한 후 24경기만을 뛰고 팀을 떠났다. 한 시즌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로메로는 KBL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갖춘 선수였다.
한국 무대에 있는 동안 평균 19.33득점 9.8리바운드 1.1블록슛을 기록한 로메로는 다른 외국인 선수들의 거친 몸싸움과 한국 농구 특유의 다양한 전술 적응에 다소 어려움을 느끼며 아쉽게 시즌 중 팀과 이별했다.
▲수비를 피해 골밑슛을 시도하는 헥터 로메로(사진=동아일보)
그러나 로메로는 끝까지 모범적이었고 프로다웠다. 퇴출이 결정 난 이후 마지막 경기까지 최선을 다하며 한국을 떠났다. 특히 2005년 12월 22일 KBL 마지막 경기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경기 종료 직적 그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덩크를 선보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 덩크는 엘보(elbow) 덩크 혹은 허니 딥 덩크라 불리는 팔을 접어 공을 림 안으로 밀어 넣는 덩크슛이었다. 이 장면은 단순히 화려한 덩크 슛 이상으로 그가 떠나는 순간까지 얼마나 KBL에 열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의미한다.
로메로가 떠나는 날 창원LG 팬들은 ‘Our hero. We don't forget Romero’라는 현수막을 걸고 경기장을 찾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KBL에 대한 존중은 앞으로도 많은 팬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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