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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둥지 기자단

마라톤을 통해 꿈을 보다-1

 

 

 이원희

 

 

 2012년 7월. 드디어 골인 지점이 보였다. 부부(김효근53, 김미순53)가 거칠게 내몰았던 숨소리도, 온 몸이 멈춰버린 것만 같던 마비도, 더 이상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5박 6일의 대장정, 국토종단 538KM의 울트라

마라톤의 종지부가 어느새 한걸음 앞에 놓여 있었다. 총 125시간 12분의 완주 기록. 이내 부부는 환한 얼굴로

골인 지점을 통과했다.

 

어둠이 찾아오다

 

 “축하드립니다. 예쁜 공주님이에요” 이보다 더 행복 할 수 있을까. 태백산 꽃 축제에서 처음 만나 부부가 된

그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엄마 김미순씨는 무사히 태어난 아기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남편 김효근씨도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부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출산 후 김미순씨 몸에서 작지만 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녀의 몸이 달라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잘 보이던 뉴스 화면이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속에 비쳐지는 자막은 고사하고 아나운서의 모습도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눈을 비비며 바라봐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악화되는 시력에 김미순씨는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차례의 검사를 받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이내 의사는 아내에게

 “이런 말씀 드리게 돼 죄송합니다만”하며 입을 열었다. 부부는 의사의 입술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김미순씨의 병명은...” 그 순간 그녀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좌절의 연속

 

 베체트병이었다. 출산 후유증이 그녀에게 커다란 아픔을 남기고 만 것이다. 좋다는 약과 용하다는 병원은 죄다 들렀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는 가족에게 현실을 받아드리라고 조언했다. 시각장애 1급으로 인한

실명. 이것이 현실이었다. 베체트병은 만성 염증성 질환으로 각 증상의 기본적인 특징은 혈관에 염증이 생기는 혈관염이다.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시력에 장애를 주는 합병증이 생기거나 실명할 수 있는 무서운 

병이다.

 

그 후 김미순씨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들어간 병원비는 어마어마해 생계유지에 힘든 점이 많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도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 김미순씨의 삶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졌다. “당시 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일반적인 경우 물건을 놓치거나 떨어트리면 무의식적으로 몸을 숙여 집으려고 하잖아요. 그러다보면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날카로운 곳에 몸이 긁히기도 하고 며칠에 한 번씩은 꼭 다쳤어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김미순씨가 요리를 하려 가스레인지 켰는데 잠시 후 방 전체에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다. “알고 보니 앞치마에 불이 붙었더라고요. 전 보지를 못해서 그것도 몰랐으니 정말 큰일 날 뻔 했죠”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점점 슬퍼져만 갔다.

 

                                                               (마라톤 입상 메달)

 

 시력을 잃은 후 그녀는 많은 것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 중 글자를 보지 못한다는 점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김미순씨에게 큰 아픔이었다. 점자를 배우려 노력도 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글자의 차이를 쉽게 감지 할 수가 없었다. 이후 그녀는 자문을 구하고자 의사를 찾아갔다.

 

“배우지 마세요” 의사가 단호히 이야기를 꺼냈다.

 

“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다.

 

“생활에 치명적이지 않다면 점자를 배우지 마세요. 어떻게 보면 제 2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환자분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어요” 의사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가슴은 먹먹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후천적 장애인이 점자를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선천적 장애를 가진 대부분은 시력을 잃은 대신 지각이나 청각에 의존해 다른 감각들이 발달했지만 저는 일반인으로 살다가

장애를 가졌으니 손끝이 무뎠죠. 병원에 가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족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김미순씨의 회고다.

 

그녀가 가장 미안함을 느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딸 김정현(28)씨였다.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무렵, 보통 아이들의 사춘기였을 때 제 병세가 가장 악화 됐어요. 그 때 눈이 너무 아파서 제대로 딸을 돌보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그녀는 딸의 고등학교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학교에 가고 싶어도 남편의 손을 잡고 움직여야 하니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에 너무 걸렸어요. 지금도 많이 미안하죠. 아이로선 가장 중요한 시기였는데..” 김미순씨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줄기 빛을 만나다.

 

죽고 싶었다. 자신이 남편과 아이에게 짐이 되었다는 생각은 그녀를 절망 속으로 집어넣었다. 하루하루 커져가는 좌절감과 자멸감은 삶의 의욕마저 빼앗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송도 성당 마라톤 동호회에서 그녀에게 ‘마라톤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며 조심스레 권유를 건냈다. 김미순씨는 고심에 빠졌다.

 

“여보 나 마라톤 시작 해볼까?” 김미순씨가 어렵게 입을 뗐다.
“마라톤? 할 수 있겠어?” 남편 김효근씨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잘 모르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걱정 말고 해, 자기는 잘 할 수 있어” 김효근씨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응, 다른 사람들도 도와준다니깐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녀는 결정을 내린 듯 목소리가 뚜렷해졌다.

 

마라톤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온 몸은 바늘을 찌르듯 쑤셨다. 마라톤을 하다 받는 서러움도 많았다. “길을 가다 사람들과 부딪치면 욕을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사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기 위해 장애인인 제가 더 관심을 기울여 길을 걷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몰라요. 비장애인이 아닌 제가 실수해 그런 줄 알아요. 지금은 바로 제가 죄송하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많이 섭섭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성취감을 느꼈다. 다시 한 번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마라톤을 통해 꿈을

 보았다. 이후 김미순씨는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연습을 통해 비거리를 늘렸고 시간도 단축해 갔다. 매주 토요일, 일요일이면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연습을 통해 뛸 수 있는 체력과 몸을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어떤

 대회가 열리더라도 완주를 할 수 있죠. 조금이라도 마라톤에 게을리 한다면 완주하기 쉽지 않아요” 마라톤은

 그녀의 삶 자체가 되어있었다.  

 

 

                                              (그들은 마라톤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같이 뛸 수 있는 동반자를 구해야만 했다. 간간히 남들이 김미순씨와 함께 마라톤을 완주했지만 꾸준히 그녀를 돌봐주며 뛴다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더불어 많은 회원들이 이사를 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송도 마라톤 동호회는 해체 됐다. 이에 고심이 많아진 그녀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남편 김효근씨였다.

 

“여보, 나랑 같이 뛸까?”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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