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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둥지 기자단

한국판 ‘칼레의 기적’, 포천에 주목하라.

 

 

 

 

글 / 홍의택

 

 

 

 

   1999-2000 시즌 프랑스 FA컵(쿠프 드 프랑스, Coupe de France). 프랑스 북부 도시팀 칼레RUFC가 상위리그 강호를 연달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정원사, 체육 교사, 구멍가게 주인 등이 모인 이들은 1918년 시작한 대회 역사상 결승 무대에 오른 첫 4부리그 팀이 됐다(2014년 현재에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1부리그 팀 FC낭트와의 맞대결에서 2-1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는 '칼레의 기적'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지난 21일 대전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2014 하나은행 FA컵 32강전에서는 한국판 '칼레의 기적'을 준비하는 팀이 있었다. K3 챌린저스리그(4부리그 격) 포천시민축구단(이하 포천)이 K리그챌린지(2부리그) 대전시티즌(이하 대전)을 2-1로 꺾는 기적을 일군 것. 2007년 출범한 챌린저스리그 팀 중 최초로 FA컵 16강 고지에 오른 파격적인 행보였다. ​현장을 찾은 정해성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전 월드컵대표팀 코치)은 "또 하나의 이슈가 탄생했다"라며 포천의 승리를 축하했다.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모든 팀이 맞붙는 대회 성격상, 전력이 불균형한 대결이 비일비재했다. 포천도 마찬가지. 운 좋게 K리그클래식(1부리그) 12개 팀을 피했지만, K리그챌린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발돋움한 대전을 만났다. 상대는 8승 1무 1패로 리그 단독 선두였다. 지난해 강등 싸움에서 내공을 쌓은 조진호 감독 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고, '신예' 서명원, '베테랑' 김은중, '외인' 아드리아노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다. 포천 인창수 감독은 "배운다는 입장으로 도전하려 했다"라며 대진이 발표된 당시를 회상했다.

 

   주로 공익 근무 요원으로 구성된 포천은 선수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 운동을 시작했다. 평소 인조잔디 구장에서 훈련 및 경기를 진행했기에 오랜만에 밟는 월드컵경기장의 천연잔디가 낯설기까지 했다. 반면 대전은 지난 3월 완공된 클럽하우스에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식단 관리, 체계적인 훈련 스케쥴, 그 외 전문 인력을 활용한 의료 치료 등 모든 면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다. 최근 빽빽한 경기 일정을 고려한 조 감독이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을 부여했으나, 포천 입장에서 대전은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   경기장에 들어선 두 팀의 모습도 달랐다. 프로팀의 경우 피지컬 트레이너가 별도의 웜업 프로그램에 따라 선수들의 몸 상태를 끌어 올린다. 포지션별 코치가 직접 지시를 내리고, 골키퍼 코치는 선발-서브 골키퍼 각각 한 명을 교대로 ​지도한다. 그동안 감독은 감독실 안에서 기자들과의 사전 인터뷰를 갖는다. 하지만 인 감독은 직접 필드를 밟으며 선수들과 함께 몸을 풀었다. 일일이 박수를 치며 호흡을 끌어 올렸고, 슈팅 동작 하나 하나를 세심히 지켜봤다. 이 때문에 경기 시작 시각인 7시 반까지 단 한 마디도 나눠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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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의 무기는 노련미였다. K리그 무대에서 50경기 이상을 소화한 선수들이 여럿 포진된 만큼 홈 팀이자 상위리그에 속한 상대를 급하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웅크린 전형을 보이면서도 틈만 나면 공격을 진행했다. 중원에서 볼을 잡은 김민-김준태 미드필더 라인이 뒷공간으로 패스를 넣어 주고, 좌우 날개 안성남과 정대환이 측면에서의 속도를 살렸다. 전반 37분, 심영성의 오픈 패스가 안성남의 크로스로 이어졌고 전재희의 머리에 걸린 볼이 선제골로 연결됐다. 후반 2분 대전 김은중에게 동점골을 내줬지만, 상대 수비수가 방심한 틈을 타 1분 만에 심영성이 팀 두 번째 골을 뽑아냈다. ​​

 

   후반 34분엔 포천의 한 선수가 경련이 난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장면도 있었다. 혼자 세 바퀴를 굴러 옆줄 밖으로 나왔으나, 응당 달려와야 할 의료팀은 없었다. 스스로 스타킹을 내리고 보호대를 뺐다. 덕지덕지 붙인 테이핑을 뜯어내고 있는 힘껏 종아리를 짓눌렀다. 물을 뿌린 뒤 다시 피치 위에 올라섰지만, 한 번 올라온 근육이 성할 리 없었다. 3분 만에 팀 동료와 교체 아웃되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포천은 여러 위기 속에서도 후반 3분에 터진 심영성의 결승골을 지켜냈고, 끝내 1-2 승리에 성공했다.

 

   불리한 상황을 극복한 인 감독은 '정신적인 동기부여'를 승리 요인으로 꼽았다. "아무래도 프로팀과 하다 보니 체력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했다."고 운을 뗀 그는 "​선수들의 하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했기에 우리 페이스대로 플레이가 잘 됐다"고 덧붙였다. 결승골을 뽑아낸 심영성 역시 "전 소속팀이 프로팀인 선수가 많았던 만큼 자존심이 걸렸다"라며 "지더라도 허무하게 지지는 말자고 선수들끼리 얘기했다. 포천에 온 지 1년 반 됐는데 그중 가장 열심히 뛴 경기 같다"라며 웃었다.

 

   챌린저스리그 최초 16강 진출, 욕심이 날 법했다. 인 감독 역시 '칼레의 기적'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자세를 낮춘 그는 "목표가 16강이었는데, 이제는 8강만 보고 착실히 준비하겠다"라며 말을 줄였다. 16강 진출팀 가운데 유일한 대학팀인 영남대가 부담이 적을 법 했지만 "어느 팀이든 우리보다 위다. 배운다는 입장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포천은 8월중에 다음 라운드 경기를 치른다(대진 미발표). 또 다른 기적을 준비하는 그들의 행보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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