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성수 (스포츠둥지 기자)
프로 스포츠에서 활약하는 외국인 선수들을 흔히 용병(傭兵)이라고 부른다. 용병의 사전적 의미는 ‘봉급을 주어 고용한 병사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외국인 선수들은 ‘용병’의 사전적 의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재 머물고 있는 팀보다 돈을 더 많이 주는 곳이 있으면 미련 없이 떠나거나,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경우 팀과 마찰을 벌여 분위기를 헤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외국인 선수가 그런 것은 아니다. 몇몇 외국인 선수들은 뛰어난 실력과 함께, 한국의 문화를 존중하며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오랜 기간 활약하는 선수들도 있다. 외국인 선수들은 즉시 전력감으로 영입되기에 빠른 시간에 실력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퇴출의 칼바람을 피할 수 없지만, 이들은 실력은 물론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신분은 용병이지만 용병이 주는 차가운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이들. 이제부터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활약한 장수 외국인 선수들을 알아보자.
1. 아디
ⓒFC서울
풀네임 : adilson dos santos |
K리그 외국인 선수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아디는 8년째 한국 생활을 하고 있는 선수다. 중국 다렌스더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 FC서울에 입단한 아디는 처음엔 큰 기대를 모으진 못했다. 오히려 연속된 실수로 순탄치 못한 행보를 걸었다. 2006 시즌 전북을 상대로 한 홈 개막전에선 퇴장을 당하며, 팀에 위기를 자초했고, 대구와의 홈 경기에선 실점에 빌미가 되는 헤딩 미스를 범하기도 했다. 덕분에 미운오리새끼로 전락하는 듯 했지만, 미운오리가 백조임을 알아차리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장수 감독의 신임아래 꾸준히 출전기회를 부여받은 아디는 부산전 박주영의 골을 도우며 첫 공격포인트를 기록했고, 이후 왕성한 활동량과 적극적인 대인방어를 앞세워, FC서울의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데뷔 시즌에 34경기에 출전해 1골 2도움을 기록한 아디는 2007년에도 36경기 출전 2골 1도움을 올렸다.
2008년에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K리그 최고의 윙백으로 자리잡는다. 귀네슈 감독의 전폭적인 신임아래 아디는 활발한 오버랩핑과 뛰어난 대인마크 능력으로 FC서울 측면수비의 핵으로 자리매김했고, 결국 팀 내 선수들 중 최다인 34경기에 출전했다. 공격에서도 활약은 이어졌다. 울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선 날카로운 크로스로 김은중의 헤딩골을 어시스트 했고, 수원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선 헤딩골을 터트리며 결정적인 순간에 해결사 노릇을 했다. 아디의 빼어난 활약 덕에 서울은 2008년에 K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남겼다.
2010년엔 멀티플레이어로서의 능력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현영민의 영입으로 인해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진배치된 아디는 시즌 초반 하대성과 함께 중원을 든든히 지켰고, 시즌 중반엔 박용호의 부상으로 중앙 수비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는 등 아디는 서울 수비의 핵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방씩 터트려 주는 해결사 본능도 여전했다. 아디는 제주와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헤딩결승골을 터트리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FC서울 역시 공로를 인정해 시즌 후엔 MVP 후보에 올리기도 했다.
2011년에는 중앙수비수로, 2012년엔 본연의 위치인 레프트백으로 돌아와 활약을 지속한 아디는 2012 시즌 중반 K리그 최초로 한 팀에서 200경기를 넘게 뛴 외국인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200경기 출전을 기념해 FC서울은 성대한 기념식을 열었고, 아디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2012년에도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팀을 또 다시 리그 우승으로 이끈 아디는 올해도 변함없이 서울 수비의 핵으로 활약중이다. 아디의 나이는 축구 선수로서는 환갑인 37세. 하지만 그는 철저한 몸관리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량을 보이고 있다. 또 브라질 선수들은 자유분방하고 약간 불성실하다는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아디는 성실한 플레이와 팀에 헌신하는 모습으로 많은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여전히 FC서울의 주력 선수로 뛰며, 역사를 쓰고 있는 아디. 그의 역사가 어디까지 쓰여질지 주목된다.
2. 제이 데이비스
ⓒ한화이글스
풀네임 : Gerrod Jay Davis |
프로야구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생긴 것은 1998년. 데이비스는 이듬해인 1999년에 한국 땅을 밟았다. 한화 이글스는 첫 용병인 부시와 치멜리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외국인 선수를 교체했고, 데이비스는 로마이어와 함께 한화 이글스의 새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로 주목을 모은 데이비스는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적시타로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고, 다음날 경기에선 3회에 투런 홈런을 날리며 팀의 10-7 승리에 공헌했다. 데이비스는 개막 3연전 동안 타율 4할1푼7리에 2개의 홈런 6개의 도루로 한화의 공격을 이끌었고, 덕분에 한화도 개막 3연승을 달리며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이후 데이비스는 두산전에서 투런 홈런을 날리며 심정수와 함께 홈런 랭킹 공동 1위에 올랐고, 쌍방울전에선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호타준족에 대명사인 20-20 클럽과 30-30 클럽 가입에도 성공했다. 8월 해태와의 경기에서 9회 솔로홈런을 터트리며 외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20-20 클럽에 가입했고, 10월 LG와의 경기에선 4회와 6회 3점 홈런을 터트리고, 도루 1개를 추가하며 30-30 클럽 가입에도 성공했다. 1999 시즌 그의 기록은 3할2푼8리 30홈런 35도루 106타점. 하지만 데이비스는 그해 45홈런을 기록하며, 거포로 활약한 로마이어에 살짝 가려진 면에 없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이어 역시 그해 54개의 홈런을 기록한 이승엽으로 인해 가려졌다) 하지만 막강한 외국인 선수를 두 명이나 보유한 한화는 강했고, 결국 1999년 한국 시리즈에서 롯데를 물리치며, 사상 첫 정상에 등극하는 기쁨을 맛봤다.
데이비스 역시 1999년은 잊지 못할 한해였다. 30-30 클럽 가입과 우승을 기록했고, 그해 최고의 스타인 이승엽과 얽힌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아시아 홈런 기록(55개)에 도전하고 있던 이승엽은 54개를 기록하며 한화와 마지막 경기를 펼쳤다. 두 번째 타석에서 이승엽은 큼지막한 타구를 날렸고, 많은 이들이 홈런을 의심치 않았지만 데이비스가 점프 캐치로 그 공을 잡아냈다. 멋진 수비로 이승엽의 55호 홈런을 저지한 것이다. 이후 이승엽에게 두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지만, 안타와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하며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다. (이승엽은 4년 후 56개 홈런을 치며 기록 경신에 성공한다.)
1999년을 자신의 해로 만든 데이비스는 2000년에도 20홈런 21도루를 기록하며 양준혁 이종범에 이어 2년 연속 20-20 클럽 달성에 성공했고, 3할3푼4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한화의 리딩히터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엔 함께했던 로마이어가 LG로 떠났지만 데이비스는 변함없이 한화에 남았다. 데이비스는 시즌 초반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시즌 중반 최다 안타왕을 다툴 정도로 실력을 과시했다. 결국 2001년에도 타율 3할3푼5리, 30홈런, 96타점으로 맹활약했다.
2002 시즌 초반엔 부진한 모습으로 클린업 트리오에서 잠시 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재기량을 회복했고, 타율은 2할8푼7리로 악간 하락했지만 2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제몫을 다했다. 2003년엔 멕시코 리그에서 활약했고, 2004년에 다시 한화로 복귀한 데이비스는 3년 동안 뛰었다. 특히 2005년엔 3할2푼3리로 타격 2위에 올랐고, 90득점으로 득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06년엔 괴물 투수 류현진과 함께 한화를 이끌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한화와 데이비스는 재계약을 추진했지만, 협상과정에서 틀어졌고, 결국 한화는 데이비스와 재계약을 포기하고 제이콥 크루즈를 영입했다. 데이비스가 한국을 떠난 지 6년이 됐지만, 그는 한화 이글스를 처음으로 챔피언 자리에 올려 놓았기에 아직도 많은 팬들이 기억하고 있다. 또 매운 한국음식을 좋아했고, 신라면을 좋아해 ‘신남연’ 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을 정도로 한화 팬들에겐 매우 친근한 선수였다.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실력 외에도 이 같은 적응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3. 조니 맥도웰
ⓒKBL PHOTO
풀네임 : Johnny McDowell |
맥도웰은 개막전부터 활약하며 세간의 평가를 뒤집었다.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맥도웰은 단단한 체격과 저돌적인 돌파를 앞세워 32점을 넣은 것이다. 비록 팀은 96-93으로 패했지만 맥도웰은 데뷔전부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맥도웰은 이상민과 호흡을 맞추며 현대 골밑 공격의 핵으로 거듭났다. 맥도웰은 나산 플라망스전에서 50점을 넣으며 시즌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평균 25점 안팎의 득점을 기록한 맥도웰의 활약 속에 현대는 11연승을 질주하며, 리그 1위로 올라섰다. 맥도웰을 비롯해 이상민, 추승균 제이 웹 등 막강한 스쿼드를 구축하고 있던 현대는 시즌 내내 독주했고, 결국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모조리 석권했다.
최고의 활약을 보인 맥도웰에게 상이 주어지는건 당연지사. 맥도웰은 그해 최우수 외국인 선수에 오르며, 데뷔 시즌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시즌 종료 후 제이 웹은 팀을 떠났지만, 맥도웰은 재계약에 성공하며 팀에 남았고, 재키 존스와 함께 외국인 선수 콤비를 이뤘다. 맥도웰의 활약은 2년차에도 계속 됐고, 결국 2년 연속 최우수 외국인 선수에 오르며, 적수가 없음을 드러냈다. 팀 역시 지난 시즌에 이어 우승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팀으로 우뚝 섰다. 그 다음 시즌에도 로렌조 홀 이라는 괴물 센터와 호흡을 맞춘 맥도웰은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의 외국인 선수였고, 결국 맥도웰은 팀을 3연패로 이끔과 동시에 자신도 최우수 외국인 선수를 3년 연속으로 수상했다. 하지만 맥도웰의 화려한 시즌도 여기까지 였다.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현대는 6위로 쳐졌고, 맥도웰 역시 지난 세 시즌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결국 현대는 시즌 종료 후 맥도웰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하지만 과거 보여준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맥도웰을 원하는 팀은 많았고, 결국 SK 빅스(現 전자랜드 엘리펀츠)에 입단하며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새로운 팀에서 맥도웰은 부활의 조짐을 보인다. 팀 내 최다인 54경기에 출전해 평균 22.8득점을 기록하며, 주축 선수로 활약한 것이다. 덕분에 팀 역시 작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맥도웰도 가는 세월을 막을 순 없었다. 맥도웰의 파워풀한 플레이는 점점 사라져갔고, 그 사이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를 앞세원 동양 오리온스(現 고양 오리온스)가 프로농구를 지배했다. 결국 SK 빅스는 그해 7위에 머물렀고, 맥도웰은 재계약에 실패했다.
이후 모비스에 입단했지만, 과거의 플레이를 보여주는데 실패했고, 시즌 도중 퇴출되어 한국을 떠나게 된다. 맥도웰이 한국을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아직도 그가 기록한 3년 연속 최우수 외국인 선수 수상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또 그는 3829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서장훈에 이어 통산 리바운드 2위에 올라있다. 남다른 한국 사랑으로 한때 귀화를 고민했을 정도였던 맥도웰. 여전히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수로 남아있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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