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병진(국민생활체육회 정보미디어부장)
주말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산에 오른다. 산이라고 해봤자 집 근처에 있는 얕은 근린공원이다.
산을 중심으로 둥그스레 한 바퀴 돌 수 있게 등산코스, 아니 산책코스가 만들어져 있다.
꼭대기 까지 올라가면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과 평지가 연속된다.
그리고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한 바퀴 도는데 약 10분정도 걸린다. 그 순환 길을 7~8바퀴쯤 돌고나면 제법 땀이 맺힌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에 익숙한 등산마니아들이야 우습게볼지 모르겠지만,
자연과 호흡하면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산 높이가 뭐 그리 중요할까.
산을 오르면서 시찌프스의 운명을 생각하다
근린공원을 오를 땐 굳이 등산화가 필요 없다. 가벼운 운동복과 신발만 있으면 된다.
스트레칭으로 굳어있는 몸을 풀어주고, 산 입구에 있는 운동기구에 몸을 싣고
허리 돌리기를 몇 차례 하면 한결 몸이 가벼워진다.
처음 두어 바퀴는 그저 산책하는 기분으로 오른다. 마지막 두어 바퀴는 가볍게 뛰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오르내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문득 그 지독한 반복이 형벌이었던
시찌프스의 운명을 생각한다. 나 또한 어쩌면 원죄를 갖고 살아가는 시찌프스의 후예가 아닌가.
내 생의 높이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는 내가 굴리며 올라가야 할
운명의 바위가 아닐까.
내 아버지, 할아버지, 그 윗대 할아버지의 숙명처럼.
그러나 난 알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반복된 하루가 역사를 만들고 문명을
발달시켜 왔다는 것을.
가끔씩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중간에서 멈추고 싶을 때도 있다. 누가 오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선택한 길 앞에서 다리가 후들거려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한다.
‘자연에 대한 도전’은 오만, ‘자신에 대한 도전’을
내가 오르는 산의 가운데 부분은 계곡을 지나듯 도로가 뚫려있다. 가끔 곁눈으로
도로를 내려다본다. 질주하는 차들이 무섭고, 차에 실려 가는 세상이 무섭고,
혹여 떨어질지 모른다는 쓸데없는 두려움도 갖는다. 추락에 대한 공포는 인간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고독이라고 했다. 난 산을 오르며, 내게 주어진 모든 관계에서의 추락,
그 두려움을 단련시킨다.
추락은 낙오의 다른 이름이다.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면 나 또한 젊은 그룹에서 낙오할 것이다.
뇌세포가 조금씩 파괴되어 가면 새로운 것들과 소원해 질 것이고, 몸이 쇠하여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을 때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자’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추락하기 전에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사랑하고, 몸과 마음을 가꾸어 나가야 하리라.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고독을 직시하라는 자연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난 지금껏 이런저런 사연으로 인해 청계산이며, 검단산, 북한산 등 10여개의 산 정상을
밟아봤다. 하지만 한 번도 자연에 대해 도전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했을 뿐이다. 나뿐 아니라 유명한 등산가들도 ‘자연에 대한 도전’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 하다. 차라리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게다.
한 인간이 어찌 위대한 자연과 겨룰까.
요즘 생활습관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의
섭리를 거역한 결과다. 직립보행의 인간이 걷기를 거부하고, 움직여야 하는
생리적 구조를 가진 인간이 움직이기를 주저한 탓이다. 요즘 키워드가 되고 있는 ‘
녹색성장’도 결국, 오만한 인류의 자기반성일 뿐이다.
지금껏 인류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좀 심하게 말하면 산업화 과정은 자연파괴,
자연능멸의 과정이다. 지구온난화와 각종 자연재해는 자연의 가르침을 곱씹게 한다.
자연은 ‘아무리 급해도 순리대로 살라’는 가르침을 줘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계단이 있다. 계단은 내게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다.
한 계단 오르는 순간 난 과거를 밟고 현실에 접어든다. 그리고 현실은 계속된다.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인연을 맺었다. 인연이 더러는 상처가 되기도 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상처주고 상처받았던 것이 어디 한두 번일까. 계단에
희미하게 찍혀 있는 앞사람들의 발자국, 그리고 뒤에 남겨진 내 발자국들. 이 모든 것들이
상처로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좀 젊었을 때는 두 계단씩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오만이다. 처음에는
빠른 듯 하지만 머지않아 심장이 곱절로 뛴다는 것을, 그래서 이내 지쳐버린다는 것을 배웠다.
말은 하지 않아도 자연은 말하고 있다.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자기를 버리는 것이
상처를 덜 만드는 것이라고. 모름지기 세상은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물처럼
자기를 낮추며 살 것, 이웃의 아픈 삶을 두루 살피면서 살아 갈 것, 아무리 급해도
순리대로 계단을 올라야 할 것이다.
얕은 산을 오르면서 마치 고산준령을 오른 듯 사설이 길어졌지만, 여하튼 난 생활체육을 통해
‘자연의 가르침’이라는 또 다른 가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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