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지호 (연합뉴스 영문뉴스부 스포츠)
믹스트 존 (mixed zone). 말 그대로 이것 저것 ‘뒤 섞이는’ 공간이다. ‘공동취재구역’이라고도 불리는
이 곳에서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취재진이 ‘뒤 섞이게’ 된다. 경기 후 보통 공식기자회견 자리가 마련되지만 막 경기를 끝내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선수들의 땀냄새를 직접 느끼며 보다 생생한 얘기를 듣는 데는 믹스트 존 만한 곳이 없다.
필자는 8월말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을 취재했다. 그 동안 여러 믹스트 존을 다녀봤지만 대구스타디움에서의 경험은 그 규모나 취재원의 다양성에 있어서 매우 색다른 것이었다.
여느 믹스트 존과 마찬가지로 대구에서의 취재구역 역시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향하는 길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말하면 선수들이 라커로 가려면 믹스트 존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경기 중 부상을 입어 바로 응급차에 실려나간 경우는 예외지만) 물론 대구에서도 메달리스트가 참석하는 기자회견이 있었지만 믹스트 존이야 말로 보다 신속하고 생생하게 소식을 타전하려는 전 세계 취재진의 욕구와 의지가 투영된 곳이라 하겠다.
아마 국가대표팀 축구 경기나 해외 축구 경기 후 어떤 선수가 인터뷰 없이 믹스트 존을 지나간 것을 비난 하는 기사를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현직 기자 인지라 그런 기사가 보일 때 마다 인터넷 댓글까지 유심히 보곤 하는 데 주로 기자에 대한 ‘악플’이 많은 편이다. 인터뷰를 하고 말고는 선수 개인 의사이니 기자가 토라져서 소심하게 기사로 복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여담이지만 인터뷰를 못 하면 선배에게 깨지는 (?) 후배 기자 입장에 서보면 왜 그런 기사가 나오는 지 이해가 될 수도 있겠다.)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직업 운동 선수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산다. 하지만 이 들이 매일 팬들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노릇. 팬클럽 활동이나 팬 사인회 행사 등도 한계가 있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기자는 선수들의 생각과 느낌을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경기에 직접 뛴 선수들의 소감이나 이들의 눈을 빌러 경기를 분석한다. 또 경기가 없는 날 좀 더 여유롭게 갖는 인터뷰를 통해 경기장 밖에서 이들의 모습은 어떤지, 단지 직업으로 운동을 하는 이들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선수들에 대해 더 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거부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차 버리는 것이다. 북미권의 스포츠 구단은 홍보부서에 선수들의 언론 대처 능력을 가르치는 전담 직원을 배치하거나 외부 컨설턴트를 초청해 특별 강의를 하기도 한다. 언론을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본인의 의사를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인터뷰가 부담스럽거나 내키지 않아 피하는 것은 야구 선수가 몸에 맞는 공이 두려워 경기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대구 얘기로 돌아가 보자. 세계 202개 국에서 1천900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참가했지만 물론 이들 모두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자메이카의 ‘인간 탄환’ 우사인 볼트,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의족 스프린터’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등이 특히 많은 매체의 관심을 받았는데, 이 들의 상황 (혹은 위기?) 대처 능력을 본 받을 만 했다.
세계육상선수권에서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 트랙 밖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가 세계 각국 주관 방송사 부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이 후 경기장 지하에 위치한 믹스트 존으로 내려왔는데 여기서는 주관 방송사 외 기타 방송사 카메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필자 같은 활자 매체 기자들은 찬밥 신세. 방송들의 인터뷰가 끝난 후 맨 마지막 차례를 기다렸고 이쯤 되면 선수와 취재진들 모두 지친 상태였다.
볼트와 피스토리우스는 예선 경기만 치르고도 주관 방송사 및 믹스트 존 인터뷰를 1시간이 넘게 가졌다. 보통 믹스트 존에서는 취재진이 선수와 근접한 거리에서 인터뷰를 녹음하거나 메모를 하는데 이 두 선수가 등장했을 땐 너무 많은 기자들이 몰려 현장 직원들이 마이크와 스피커를 대동하기도 했다.
피스토리우스는 남자 400미터 예선을 통과하고 1시간 가량 방송 인터뷰를 소화한 뒤 활자 매체 취재진에게도 10분 가량을 할애한 후에 “몸이 다 식었다”고 웃으며 공동취재구역을 빠져나갔다.
여러 매체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지만 이 둘은 거리낌 없이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 섰다. 볼트는 언론 앞에서 특유의 자신감을 드러냈고 100미터에서 부정출발로 실격된 후에도 “모든 게 내 잘못”이라며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세계선수권에 나서는 것이 평생 꿈이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피스토리우스에게서는 신체가 온전한 선수들에게서 보기 힘든 절박함 마저 느껴졌다.
이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언론을 피했다면 전세계 스포츠 팬들이 이런 사연을 알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는 너무 선수들의 책임만 강조한 것 같다. 경기를 막 마치고 (특히 경기에서 진 후에는) 수십 분간 서서 반복되는 질문에 계속 답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또 기자들이 지켜야 할 것들도 있다. 각종 경기를 현장에서 취재하고 선수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것은 분명 특권이고 이를 남용해선 안 된다. 특정 선수가 인터뷰를 거부 했다고 해서 개인적 감정을 내세워 그를 비방하는 것은 기자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일이다.
물론 기자도 사람인지라 퉁명스러운 취재원은 아무래도 안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된다. 또 독자와 시청자의 알 권리를 생각하면 정당한 범위 내에서 취재를 요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취재원도 기자의 업무를 이해해주고, 기자 역시 취재원을 단순히 “기사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준다면 보다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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