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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서기 마라톤, '순위경쟁'에서 '기록경쟁'으로 바뀌나?

글 / 이종세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마라톤 스타들
, 세계선수권대회 외면 경향도

지난 8월24일 베를린에서 막 내린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육상의 꽃’인 마라톤에서 두 가지의 뚜렷한 변화가 감지됐다.

우선 8월의 무더위 때문에 그동안 순위경쟁을 펼쳤던 남자 마라톤이 이젠 기록경쟁으로 바뀌었다.
또 하나는 세계 최고의 마라톤 스타가 ‘기록의 산실’인 9월의 베를린국제마라톤 참가를 위해
세계 정상을 가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잇달아 외면한 점이다.

이 같은 변화는 작년 8월 베이징올림픽에 이어 1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으로
국제마라톤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평가다.

한 여름 레이스에서도 2시간 6분대 기록 속출...종전엔 2시간 8,9분대

8월 22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 순환코스(10km 코스를 네 바퀴 돔)에서 벌어진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마라톤은 2시간 6분 54초의 대회 최고기록을 작성한
케냐의 아벨 키루이가 우승했다.
또 37km 지점까지 키루이와 함께 뛴 팀 동료 엠마누엘 무타이(케냐)가 대회 최고기록인
2시간 7분 48초로 2위에 올랐다.

키루이와 무타이의 대회 최고기록은 2003년 제9회 파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모로코의 자우드 가립이 세운 2시간 8분 31초를 6년 만에 경신한 것으로,
키루이는 1분 37초, 무타이는 43초를 각각 단축했다.

1983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제1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헬싱키에서 개최한 이래
이 대회는 1991년까지 4년마다 한 번씩 열어오다 1993년 대회부터 2년에 한번 씩 개최,
올해 12회를 맞았는데 개최시기는 가장 무더운 8월이 대부분이었다.

    왼쪽에서 부터 아벨 키루이(케냐),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에티오피아), 사무엘 완지루(케냐
                                                                                             미지출처<연합뉴스>

종전엔 기록경쟁 엄두 못내... 베이징올림픽부터 스피드 경쟁 불붙어


이 때문에 개최지 기온에 매우 민감한 마라톤은 기록경쟁보다는 순위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 2시간 5, 6분대를 겨냥해 달리다가는
쉽게 지쳐 중도 포기가 불가피하기 때문. 따라서 선두 그룹의 레이서들은 곁눈질로 경쟁자들의
스피드와 컨디션을 살펴가며 힘을 최대한 아꼈다가 40km 지점 이후의 막판에 승부수를 걸어왔다.

1991년 제3회 도쿄 세계육상선수권 남자마라톤에서 조국에 세계육상선수권 첫 금메달을 바친
일본의 ‘국민 마라토너’ 다니구치 히로미(谷口浩美)도 폭염을 이기지 못해 순위경쟁을 벌이다
2시간 14분 57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맨 먼저 통과, 일본 열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다니구치의 우승기록은 올 대회 우승자 키루이의 기록에 비해 8분 03초가 뒤지는 것으로
거리로 따지면 2.4km나 된다.

혹서기 레이스에서 2시간 6분대의 기록이 처음 나온 것은 작년 8월 24일 베이징 올림픽 남자마라톤.
당시 케냐의 사무엘 완지루가 예상을 깨고 2시간 6분 32초의 기록으로 우승한 것.
완지루의 기록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포르투갈의 카를로스 로페스가 수립한
2시간 9분 21초의 대회 최고기록을 24년 만에 2분 49초 앞당겨 마라톤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때문에 그 동안 ‘봄, 가을의 국제마라톤에서는 기록경쟁,
한여름의 세계선수권대회나 올림픽에서는 순위경쟁’이라는
마라톤 레이스의 개념이 바뀌고 있어 이에 대한 한국마라톤의 대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게브르셀라시에 작년부터 올림픽, 세계선수권 외면... 대회권위 흠집

한편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매년 9월 하순에 열리는 베를린 국제마라톤에서
세계최고기록 경신을 노리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참가를 외면, 대회 권위에 흠집을 남겼다.

작년 2008 베를린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3분 59초의 세계기록을 세웠던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는 2009 베를린국제마라톤에서
자신의 세계기록 경신을 위해 2009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출전을 포기했다.

게브르셀라시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마라톤에도
“베이징의 공기 오염 때문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1개월 뒤 열릴
베를린국제마라톤을 의식해 올림픽 참가를 거부한 것.
베이징올림픽은 혹서 때문에 기록경신이 어려운데다 베이징 올림픽을 뛸 경우
체력 회복을 위해 적어도 3개월은 쉬어야하기 때문.
여기에 베를린국제마라톤 조직위가 지급하는 막대한 참가비와 우승상금 역시 놓치기 아까운 호재.

작년 올림픽 우승자 완지루도 올 세계선수권대회 참가 외면

이 여파는 작년 베이징올림픽에서 2시간 6분 32초의 놀라운 기록으로 우승한
완지루에게도 미쳐 완지루의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마라톤 출전을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마라톤 세계 기록보유자인 게브르셀라시에가 베를린 국제마라톤 참가를 겨냥,
작년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도 불참하자
완지루도 올 세계선수권대회 대신 9월20일의 베를린국제마라톤에 나가기로 한 것.

세계마라톤 기록의 산실인 베를린 국제마라톤은 9월 20일 세계최고기록 보유자인
게브르셀라시에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우승자인 완지루가 ‘세기의 대결’을 펼치게 됐지만
세계최고의 권위를 지켜온 올림픽과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마라톤은 그 위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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