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KBS의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방영한 ‘슬픈 금메달’이란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과거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은퇴 후 현재의 모습을 재조명한 내용으로 학생운동선수의 학습권 보장과 장래설계를 도와야한다는 과거 유명 선수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주장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 즈음하여 여러 언론 매체에서는 ‘공부하는 운동선수’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다루어졌고, 여러 선수들의 성공 스토리가 롤모델로 전파를 탔다.
또, 그 즈음하여 필자가 다니는 학교에도 또 하나의 성공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신궁 김수녕 선수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수문장 이운재 선수, 그리고 핸드볼의 월드스타 윤경신 선수가 같은 해에 같은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운동선수로 최정상의 위치에 서봤고, 각각 은퇴하거나 프로와 실업계 노장의 위치에 있는 선수들이 다시금 학업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분명 나름의 계획과 목표가 있을 터.
그 중 오랜 독일 생활을 접고 국내 무대로 복귀한 지 2년 째, 석사학위 취득과 아시안게임 준비로 분주한 윤경신 선수를 만나 누구보다 학생 운동선수로서의 고충을 잘 알고 있을 법한 월드스타에게서 한국 스포츠계, 그리고 학원 스포츠계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바쁜 와중에도 스포츠둥지를 위해 귀한 시간을 내준 윤경신 선수
Q 스포츠둥지
안녕하세요, 윤경신 선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벌써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대학원 입학은 어떤 계기로 결정하게 되었나요?
A 윤경신선수
시간이 흐를수록 운동선수도 공부를 해야한다는 인식이 커졌습니다. 지금까지는 큰 무대에서 성공하기 위해,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경기 기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앞섰는데 생각이 변하더군요. 바로 앞의 한 발이 아니라 먼 결승 지점을 보니 운동 기능만큼 이론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죠.
Q 스포츠둥지
그럼 지금 학위 과정이 윤 선수의 은퇴 후 계획과 최종 꿈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A 윤경신선수
네, 분명 은퇴 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실기를 지도하는 능력은 독일이라는 큰 무대와 우수한 유럽 선수들과의 경쟁과 같은 지금까지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고, 이제 이론인데 이 부분은 앞으로 배워야할 부분이 너무나 많아요. 차근차근 이론 공부를 통해 지식을 쌓아 제 능력을 상승시키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공부에 관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분들과의 교류가 매우 중요할 것이고요. 또 그 분들에겐 제 지식을 통해 핸드볼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Q 스포츠둥지
윤경신 선수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서도 손꼽히는 스타 선수인데 어떻게 핸드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A 윤경신선수
핸드볼을 처음 시작한 건 12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그 때도 또래보다 컸던 신장과 운동신경, 그리고 왼손잡이라는 장점을 보신 체육 선생님께서 핸드볼을 권유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저의 핸드볼 인생이 시작됐죠.
Q 스포츠둥지
보통 선수들이 초등학교 3-4학년 때 운동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5학년이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빠른 편은 아니었네요. 그럼 운동과 학업을 병행했던 윤 선수의 학창시설은 어땠나요?
A 윤경신선수
중, 고등학교 시절엔 오전엔 수업, 오후엔 운동의 패턴이었죠. 물론 오전 수업은 명목상일 뿐 거의 빠지다시피 했지만요. 그래도 저는 남들과 달리 욕심이 있는 편이어서 시험 땐 열심히 했어요. 다른 일반 학생들처럼 꾸준하게 공부를 하진 못했지만 시험기간 만이라도 벼락치기로 공부를 했죠. 그 때 반 친구들이 잘 정리해 놓은 노트를 빌려가며 시험공부 했던 기억이 나네요.
Q스포츠둥지
역시 지금의 윤 선수를 만든 현명함이 학창시절에도 다르지 않았단 생각이 드네요. 어떤 운동선수에게서 대학 와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이 도서관에서의 밤샘 공부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 학창시절로 돌아가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윤 선수는 어떤 걸 해보고 싶은가요?
A 윤경신선수
전 도서관에서의 밤샘 공부는 아니었지만 MT나 잔디밭에서의 맥주 한 잔 같은 추억이 없다는 것이 제일 아쉬움으로 남아요. 어린 시절부터 대표팀 활동을 하느라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선수촌에서 보냈거든요. 늘 꿈꾸던 대학생활의 낭만이 그저 꿈으로만 끝난 거죠. 그리고 하나를 더 꼽자면 친구입니다. 그 때 제가 꿈꾸던 대로 대학생활의 낭만을 만끽했다면 지금쯤 두런두런 추억거리를 함께 나눌 친구들이 많겠죠. 그런데 지금 연락이 유지되는 대학 동기들이 많지가 않거든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점이 참 안타까워요.
Q스포츠둥지
윤 선수는 대학 졸업 후 국내 실업 무대를 거치지 않고 독일로 건너나 그 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죠? 총 8번의 득점왕이라는 기네스적인 기록도 보유하고 있고요.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 본 독일의 학원 스포츠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어떻게 다른가요?
A 윤경신선수
제가 96년에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서 2008년까지 12시즌을 뛰고, 총 13년을 독일에서 생활했어요. 독일은 우리나라의 학원 시스템과 달리 클럽 정책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즉, 수업과 운동은 별개라는 거죠. 독일은 우리나라처럼 학생운동선수란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운동은 분명하게 취미생활일 뿐이에요. 왜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의 부모를 보면 어린 나이에 운동을 시키면서 ‘얘는 운동으로 키워야겠다’라고들 생각하잖아요. 독일은 그렇지 않거든요. 아이가 운동을 하겠다 혹은 아이에게 운동을 가르치겠다는 출발점이 선수가 아니라 취미라는 거죠. 그래서 공부에 대한 기본이 먼저 밑바탕이 돼야 취미생활인 운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독일의 스포츠입니다. 또 이것이 단순한 운영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이기도 하고요.
Q스포츠둥지
그렇다면 운동량만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와 독일은 비교가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지금 한국과 독일의 핸드볼 저변이나 기량, 모든 면에선 또 우리나라가 독일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정말 아이러니합니다.
A 윤경신선수
그렇죠. 우리나라와 독일이 투자 시간 대비 기량 차이가 오는 첫 번째 이유는 신체적 차이일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훈련 방식의 차이일 거고요. 아마 중․고등학교 팀들 간 시합을 하면 분명 우리나라가 우세하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실업은 월등한 실력의 차이를 보이죠. 저는 그 차이가 선수들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즐기면서 하는 스포츠가 몸에 밴 독일 선수들과 달리 그렇지 못한 우리나라 선수들은 금방 질리고 싫증이 나게 되죠. 또 어린 시절부터 억압된 환경 하에서의 훈련 습관은 창의성 부족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가 시합에 고스란히 반영되게 되는 겁니다.
Q스포츠둥지
네, 그럼 우리나라가 선수 육성에 있어 독일로부터 배워야할 점은 무엇일까요?
A 윤경신선수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와 독일은 학원과 클럽이라는 운영 시스템부터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차이를 무시하고 다른 선진국을 따라가려고만 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점마저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정신력과 단합은 그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특기거든요. 그리고 지금껏 우리나라가 일군 성적과 기록은 우리만의 형태에서 가능했고, 학원 시스템 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한 수정된 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꼽자면 유럽식의 체계적 훈련방식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선진 국가에 비해 아직 주먹구구식의 훈련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팀 내 물리치료사와 닥터는 필수적으로 채용하고 있어 선수의 부상 방지와 치료, 재활을 과학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즉, 자율적인 운동이 가능한 환경이다 보니 선수 스스로 몸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고 선수와 스텝 모두 어떤 것보다 몸 관리 체계를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죠. 또 부상관리에 있어 감독과 선수 간에 중간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총책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외국은 이런 담당자가 감독과 선수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조절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선수들의 컨디션과 부상 등 감독에게 직접 알리기 힘든 부분을 상세하게 전달해주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중, 고등학교 유소년의 경우는 감독과 선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힘들죠. 그렇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몸 관리가 중요한 시기의 선수들이 부상관리에 실패하여 선수생활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몇 십 년 간 유지되어온 시스템을 뒤흔들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바꾸어야 할 부분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고쳐나가야 할 거에요. 그게 바로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가 뒤처지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Q스포츠둥지
윤 선수의 지적대로 자의든 타의든 중간에 운동을 그만두는 어린 선수들이 많잖아요. 그런 선수들이 다시 일반 학생으로 돌아갔을 때를 생각해보면 학업 적응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결국 학생운동선수들의 최소한의 학업 능력 유지를 보장해야 하는 쪽으로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작년부터 학기 중 토너먼트 대회를 모두 폐지하고 주말리그제를 도입했고, 각 종목의 대학연맹들 역시 리그제를 확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윤경신선수
저 역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정책적인 면에서는 아주 올바르고 훌륭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수에게는 매우 고달픈 혹사가 될 수도 있겠단 우려가 생깁니다. 주중 내내 운동과 훈련을 하고 주말에는 선수들 역시 좀 쉬며 휴식이 필요할 텐데 그런 시간에 시합을 해야 한다면 선수들의 자유시간이나 프라이버시에 분명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또 이런 부분들이 선수들의 부상이나 스트레스처럼 심신의 모든 부분에서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구요. 우리나라처럼 선수들의 대회 성적이 상급학교의 진학이라는 입시와 직결되는 체제하에서 주말리그제는 어쩌면 선수들의 기본권을 배려하지 못한 시스템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운동 자체가 좋아서 즐기며 하는 외국의 경우와는 또 다른 것이죠. 하지만 학생운동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는 저 또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Q스포츠둥지
주말리그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네요. 역시 경험에서 우러난 의미있는 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윤경신 선수를 보며 미래의 꿈을 그리고 있는 꿈나무 선수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A 윤경신선수
저는 학창시절에 운동으로 인해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점이 후회로 남아요. 하지만 만약 제 아들이 저처럼 운동을 한다고 하면 외국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도록 도와줄 것이란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덜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것이지 운동을 많이 한 것 자체에 대한 후회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나라 스포츠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 선수들이 운동 못지않게 공부도 열심히 했으면 합니다. 또 더 크게 보아 우리나라 실정에는 맞지 않지만 운동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취미로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운동을 하며 공부도 해야 더 느끼고 배우는 것이 많을 거에요. 선수 개인적으로도 운동을 관두었을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어린 선수들이 스포츠의 미래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미래이기도 하잖아요.
스포츠둥지
네, 너무 감사합니다. 윤경신 선수의 바람을 이룰 수 있도록 이 글을 읽는 학생운동선수, 그리고 학교, 정부 모두가 가슴으로 정진하여 미래에는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선수가 다른 나라에게 롤모델이 되었으면 합니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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