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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학교체육 ]

사랑해요, 수업씨!!!

          

                                                                                                      글 / 천항욱 (배명고 교사) 

이전에 속해 있었던 교육청에서는 매년 ‘수업방법개선연구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교육청 관할의 학교는 의무적으로 1팀이 참가하여야만 했다. 다른 학교는 어떻게 연구팀을 선발하는지 모르지만,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연구팀(교사)을 선발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연구팀(교사) 선정을 위해 회의가 소집된다. 그러나 회의를 통해 연구팀(교사)이 정해지는 경우는 없었다. 많은 교사들이 수업연구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교육청에서 연구비를 지급하였으며, 교육청 지원이 중단된 이후에도 학교 자체적으로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적지 않은 연구비에도 연구를 자원하는 교사는 없었다.

한창 학위 과정에서 수업연구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던 필자는 학교를 구한다는 신념(?)으로 연구교사에 지원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연구교사는 4년 동안 계속되었다. 4년 동안 필자를 대신할 연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학기가 되면 연구교사를 하지 않겠다고 배짱을 부린 적도 있었다. 연구교사를 하더라도 대접을 받으면서 하고 싶었다. 배짱을 부려도 대접을 받는데는 지장없었다. 아무도 수업방법개선연구대회에 참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타 교과의 부탁으로, 연구부장의 부탁으로, 때론 연구를 진행하던 동료 교사의 포기 등의 이유로 수업방법개선연구대회는 매년 당연히 필자가 하는 업무처럼 되어버렸다. 필자로서는 아주 커다란 대접을 받아가면서 진행하는 유일한 재미있는 업무였다. 상장도 받고, 연구비도 받고, 칭찬도 듣고.

그 이후 다른 교사들의 수업연구에 조언을 하게 될 기회가 여러 차례 생겼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은 교사들이 ‘수업연구’를 하기로 결심을 했지만, 무엇을 연구할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한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연구를 하기로 결심하는데 겪는 곤란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지’ 찾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연구해야 합니까?”
“선생님께서 수업을 진행하면서 궁금한 점이나, 불편했던 점에 관해 연구해보세요.”
“전 별로 불편한 것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는데요.”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업을 하면서 어떻게 불편한 점이 없고, 궁금한 점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이들이 수업에 대해 자신들이 많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수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이 생길까? 답은 간단하다. 수업을 사랑하면 된다. 수업을 사랑하게 되면 끊임없이 수업이 궁금해진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의 대상에 대해 생각이 이어지고 그리고 그 생각은 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한계로 인해 더 많이 모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무엇일까?”, “무엇을 할까?”,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 “왜 그렇게 했을까?” 등등.

사랑의 대상이 항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독자들도 잘 아실 것이다. 필자의 예를 들자면 매주 금요일에 출전하는 테니스대회, 새로 구입한 카메라, 운동회를 앞두고 있는 아이, 실기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 이 모두가 애틋한 사랑의 대상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 대상에 대해 생각이 이어지기 마련이고, 이어지는 생각은 대상에 대해 궁금증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필자의 경우 이번 주 테니스대회의 날씨는 어떨지, 어떤 파트너와 함께 출전할 지, 어떤 작전을 준비할 지, 라켓, 거트의 상태는 어떤지, 어떤 상대들이 출전하는지, 체력안배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상대의 백핸드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 지, 공격의 패턴은 어떻게 할 지, 저녁식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테니스대회를 간다면 아내는 어떤 표정을 지을 지 등등이 그런 것들이다. 매주 테니스대회에 출전하면서 질문의 많은 부분들을 해결했지만 새로운 질문은 또 어김없이 떠오르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수업을 좋아하게 되면 수업이 마냥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수업이 궁금해지니 수업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수업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한다. 궁금증을 해결하니 수업이 더욱 잘된다. 수업을 잘하게 된 것은 교사의 전문성이 향상된 것이다. 결국 교사의 전문성 향상은 ‘수업을 사랑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업이 일이고 노동인 교사들에게 수업을 항상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사랑도 가끔은 식기도 하니깐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하기 힘든 것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수업이 좋아지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양이 최소한의 질을 담보 한다’는 명제가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해 최소한의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감정이 생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반대로 생각이 감정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수업에 관해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수업에 대해 감정이 피어 오른다. 이 작은 감정을 발판 삼아 수업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물론 생각을 반복하는 과정에서도 수업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한다.

즉 수업에 관해 계속 생각을 이어가면 최소한 수업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애정은 우리에게 수업에 관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교사라면 누구나 자신의 수업에 대해 상당한 전문성을 확보하여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이러한 전문성을 비공식적이고 주관적인 과정을 통해서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이렇게 쌓아 온 전문성들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개성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개성으로만 이해하기엔 때론 위험한 측면이 있다. 간혹 이러한 독특함으로 인해 교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독특함이 때론 학생, 학부모, 동료교사와의 소통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버린다. 교사의 행동은 이해 가능하며 예측 가능한 행동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공식적인 과정에 꾸준히 참여하여 객관적이고 타당한 방법으로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공식적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수업을 사랑하는’, ‘수업을 생각하는’ 교사는 그렇지 않은 교사보다 훨씬 수월하게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수업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수업을 사랑하는’ 교사는 적어도 무엇을 연구해야 되는지를 가지고 고민하지는 않는다. ‘수업을 사랑하는’ 교사에게는 그 이후 과정의 실천만이 요구될 뿐이다.

수업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교사가 이상적이지만, 수업을 사랑하기 위해 수업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교사의 중요한 책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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