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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운동선수의 약물은 필요약?

글 / 이종하 (경희의료원 재활의학과 부교수)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100m 결승에서 캐나다의 벤 존슨은 9.79초의 기록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기 후 실시한 도핑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아 금메달을 박탈당하고,
당시 2위를 했던 미국의 육상 천재 칼 루이스가 1위를 승계하였다.

존슨은 자신은 약물을 복용한 적이 없으며,
시합 전 날 누군가 건넨 한약 드링크를 마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온 약물은 당시 검출된 적이 없는 최신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인
스타나졸롤(stanazolol)이었다.
그때 무의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하던 필자는 한약 드링크로 인해 한국이
국제망신을 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 새삼 기억난다.
더 해프닝이 된 것은 금메달을 승계한 칼 루이스도 대회 직전까지 약물을 복용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15년 뒤에 드러나는 데, 그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당시 미국 스포츠당국은 올림픽이 열리기 전 자체적으로 올림픽 출전 선수를 대상으로 한
도핑검사를 하였는데, 칼 루이스의 소변에서 금지약물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제재를 취하지 않았고, 루이스는 이것을 숨기고 올림픽에 참가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반도핑 활동이 엄격해진 요즘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현재 세계반도핑기구에서는
이것을 사전 도핑검사라 하여 금지하고 있다), 국가 간 금메달 경쟁이 치열하던 당시에는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비밀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벤 존슨은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조국 캐나다의 수치가 되었다.
또 이 도핑 스캔들로 인해 이전 대회까지 엄격하지 않던 도핑검사가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사실 상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8년 8월 북경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을 때, 타임 온라인판은
'112년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 중 1위로 벤 존슨의 약물복용
을 꼽았다.

그런데 벤 존슨이 복용했던 스타나졸롤이 21년이 지난 요즘,
우리나라 프로야구선수 대상 도핑검사에서 검출되었다.
2009년 6월 한국야구위원회 반도핑위원회에서 전 구단 선수를 대상으로 도핑검사를 실시하였는데,
외국용병 에르난데스의 소변에서 금지약물 양성이 나왔고, 확인된 약물은 바로 스타나졸롤이었다.
사실 에르난데스는 메이저리그에서 다른 금지약물인 암페타민을 복용한 것이 적발되어
50게임 출장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이 문제로 인해 그는 어렵게 한국행을 선택했지만, 그를 받아준 구단의 호의를 무시하고
약물을 몰래 복용하여 구단에 큰 피해를 끼쳤다.
그리고 자신은 프로스포츠 금지약물 복용 1호 선수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금지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왜 그렇게 문제를 삼을까?


혹자는, '선수들이 약물 복용하는 것을 왜 그렇게 막을 필요가 있는가,
선수가 보여주는 최상의 결과만 즐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 금지약물 복용을 사실상 묵인해 왔었다.
최상의 컨디션과 파워로 홈런을 양산했던 빅맥 마크 맥과이어는 수많은 백인 야구팬을
야구장으로 이끄는 흥행수표였다.

결국 돈벌이가 목적인 프로스포츠의 특성상 금지약물 문제보다 관객 수가 더 중요 하였다.
그러나 1996년 내셔널리그 최고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약물과 마약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켄 카미니티,
개인 통산 462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은퇴한 강타자 호세 칸세코 등이 메이저리거의 약물 사용을 폭로하고, 베리 본즈, 제이슨 지암비 같은 강타자가 약물에 의존하여 대기록을 세웠다는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팬들의 열화 같은 성화에 비로소 본격적인 약물 검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운동선수가 금지약물을 복용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주기 때문이다. 어떤 선수의 현재 경기력은 자신의 몸 상태로 할 수 있는 최대 능력의 표현이다.
약물을 복용하여 경기력을 올린다는 것은 능력이 안 되는 몸에 억지로 과부하가 걸리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열 상태의 전기모터를 더 강하게 돌리는 것과 같다.
그 결과 모터가 타버리는 것처럼 약물을 남용한 신체는 심각한 건강 이상 상태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감기에 자주 걸리고, 자주 몸이 쑤시고 아프며, 심지어 심장마비로 급사를 할 수도 있다.

금지약물을 복용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공정성 문제이다.
원래 능력이 안 되는 선수가 약물에 의존하여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시험을 컨닝하여 성적을 올리는 것과 같다.
이것을 제재하여 금지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선수들도 약물에 의존하는
아귀다툼이 일어날 것이다.
스포츠는 인간 신체만으로 한계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며,
이웃 간에 평화를 도모하는 깊은 이상을 기초로 한다.

좋은 장비를 빨리 개발하여 이웃을 죽이는 전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헬리콥터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을, 걸어서 절벽을 타고 등정한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 속에
스포츠의 의미가 담겨있다.

금지약물이 경기력 향상에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될까?

현대 스포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약물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합성한 남성호르몬)이다.
이 약물은 근육을 크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헬스클럽에서 근육을 키우고자 하는 분은 한 번 쯤은 보충제라는 이름으로 복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경험이 있는 분에게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운동할 맛이 나고 강하게 운동해도 피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경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나 동시에 인체에 해를 줄 수 있는 약물이다.
피로를 줄이고, 운동 중 집중력을 높이며, 자신감을 증가시키는 역할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몸을 혹사하고, 약물에 의존할 개연성이 높다.
그 결과 심장을 포함한 전신에 부담을 주고 심장마비로 인한 급사의 위험성이 높다.

전문선수나 프로선수는 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꿈은 부상 없이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다.
한 번의 나쁜 기회로 약물의 효과를 알게 되면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약물 복용 때문에 한국에 온 에르난데스가 다시 약물을 복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지약물은 운동선수에게 필요약이 아니라 퇴출해야 할 마약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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