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조준호 (인천대학교 강사)
우리나라 자장면의 원조, 사이다의 원조, 쫄면의 원조, 담배의 원조 등이 암시하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인천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이 인천은 최초와 원조(鼻祖)라는 수식어가 유독 많이 따라붙는 도시이다.
특히 체육사적으로도 매우 주목할 만한 사항은 체육인들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운동장의 원조도
바로 인천에 있다는 사실이다.
인천청년운동의 발상지,
인천최초의 공설 운동장,
인천시민의 애국심 발원지,
그곳이 바로 웃터골운동장이다.
웃터골은 청년들의 기개와 시민들의 진지한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운동장이다.
아직도 웃터골운동장은 인천시민들에게 성스러운 체육의 성지로 불린다.
2009년 웃터골운동장의 현재 나이는 89세로 이제 곧 구순(九旬)이 된다.
웃터골운동장이 백세, 이백세가 되는 날, 이곳은 한국체육의 성지(聖地)가 될 것이다.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을 우리는 웃터골운동장이라고 불렀다.
인천시내 어디에서도 항상 산등성이의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항상 높아만 보였다.
그래서 이곳을 산기슭에 있는 높은 곳이라 하여 모두가 웃터골이라 불렀다.
웃터골에는 우물이 있어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생활수를 얻었다고 한다.
그들이 웃터골에서 물만 떠갔을까?
물이 있는 곳, 교통이 발달된 곳, 넓은 분지, 그곳에서는 분명 체육활동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체육활동이 있었다. 이러한 웃터골운동장의 최초 설립과정과 체육활동,
그리고 웃터골이 한국근대체육사에 미친 영향을 본 내용에서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1. 웃터골운동장의 설립과정은?
천연의 분지 웃터골은 이미 그 시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운동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웃터골이 보다 구체적인 운동장의 모습을 갖추며 확장된 시기는 3·1운동이 끝나고
그 다음해인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는 시기였다.
신문발행과 사회단체의 조직이 허용되는 등의 사회전반의 유화분위기로 인해 인천에 웃터골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당시 인천내의 관청, 은행, 미두취인소, 학교 등의 각 기관에는
체육구락부가 결성되었고, 스포츠 붐이 일게 된다. 이에 웃터골운동장이 경기를 치르기에 협소해
불편해지자 인천부는 결국 부내 산근정 26번지에 위치한 웃터골을 확장하게 된다.
결국 인천부는 조선체육협회와 용산철도 야구부의 협조를 통해 확장설계를 실시하여
대정9년(1920년), 11월 1일 2천 3백 63평에 기부금 5,250원으로
‘그라운드’의 형태를 갖춘 공설운동장을 준공하였다.
또한 웃터골은 다시 1926년에 공사비 1만원을 들여 6천 450평으로 재 확장하였으며
그해 겨울에는 이곳에 스케이트장도 개장하여 인천체육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다.
2. 웃터골운동장에서는 어떤 체육활동이 실시되었는가?
웃터골운동장에서는 시대를 반영하는 엄복동과 조수만의 초기 자전거경기대회도 열렸으며,
해마다 여는 춘(春)․추(秋)의 각 학교 대운동회와 연합체육제전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이러한 체육활동 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경기는 바로 야구경기였으며 특히 한․일간 야구경기가 있을 때면
으레 장외 민족대결까지 벌어져 일본 경찰이 출동해 관중을 해산시키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한용단(漢勇團)'과 미두취인소의 ‘미신(米信)’팀 간의
라이벌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현재의 웃터골 일대는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고 한다.
3. 웃터골운동장이 한국근대체육사에 끼친 영향은?
일제강점기의 인천은 개항장으로서 외국인 집단거주지역(租界地)이 존재하고 있었다.
웃터골은 바로 이러한 조계지와 매우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외국인들의 스포츠공간이 되기도 했다.
또한 웃터골에서는 인천대표팀과 일본 제1함대 수병들, 혹은 미국 상선 ‘윌리암’호 선원들과의
야구경기나, 상해 유학생들과의 축구경기 등 국제경기형식을 띤 새로운 형태의 스포츠도
웃터골운동장을 통해 자주 소개되었다. 여기에 웃터골은 이미 1920년 11월에 확장 개장하여
한국근대스포츠 발전의 토대가 된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보다 4년이나 빠르게 건립되었다.
시설의 규모면에서는 경성운동장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웃터골운동장은 인천항을 통해 도입된
근대스포츠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실험적 체육공간으로서 한국근대스포츠의 개척지였다.
이상과 같이 웃터골운동장은 인천체육의 성지라 불리며 매우 유서 깊은 스포츠시설로
한국근대스포츠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인천의 향토사학자 고일은《인천석금》에서
웃터골운동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인천청년의 ‘발원지’는 별항(別項)에 기록하거니와 인천청년의 발상지는 웃터골이다.
인천시민에게 민족의 얼의 씨를 뿌렸고 민족주의의 묘목을 심었었고 반일 항일의 횃불을 드높이
들어 8.15광복의 첫 페이지를 열어 제친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은 웃터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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