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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축구를 통한 평화는 가능할까?

                                                                         글/송형석 (계명대학교 체육대학 교수)




오늘날 축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축구의 인기가 높은 만큼 축구에 거는
기대도 많다. 평화는 그러한 기대 중 하나이다. 축구는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

먼저 평화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평화는 개인적 차원, 사회적 차원, 국제적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개인적 차원의 평화란 개인의 내적 욕구들이 조화롭게 유지되고 있는 심리상태를
뜻한다. 사회적 차원의 평화란 한 사회 내에서 개인과 개인 또는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국제적 차원의 평화란 국가 간에 분쟁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제 각 차원의 평화와 축구의 관계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난동을 부리는 훌리건


동물행동학자 Morris는 축구가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에게 내재한 공격본능과 누적된
울분을 없애준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알기 쉬운 규칙과 변화무쌍한 상황, 힘과 기술,
개인기와 팀워크 등 단순하고 역동적인 축구의 속성은 관중을 열광시켜 원초적 욕구의 배출을
쉽게 만들어주어 마음의 평화를 되찾게 해준다고 평가했다. Lorenz와 Pelt도 축구와 같은
스포츠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축구가 인간의 공격적 태도의 학습기회를 제공해, 오히려 공격본능을 증가시켜준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다. Wachter는 관중이 축구경기를 본 이후에 오히려 공격성이 더 증가했다는
Serif, Montagu, Goldstein/Arms 등의 연구결과를 들어 카타르시스이론을 반박했다. 광적
축구팬인 슐라하텐부믈러(Schlachtenbummler)나 훌리건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Guttmann은 축구경기 관람 직후가 아니라 경기가 종료된 후 벌어지는 가두행진이나 호프집에서의
소란행위 등과 같은 뒤풀이 후에 공격성을 측정했다면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Guttmann의 주장처럼 축구에 뒤풀이까지 포함시킬 경우 축구가 마음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카타르시스이론은 분명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사회 평화를 위한 축구의 역할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회의론자들은 축구가 한
집단의 통합에는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르나 기본 속성상 두 집단의 대립과 경쟁인 만큼 경쟁하는
두 집단 간에 분열과 갈등을 유발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스포츠의 경쟁적 속성은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과의 관계를 통해 내부의 강력한 결집을 꾀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Durkheim이 호주 원주민 아룬타 족의 격정적 상호작용과 집단흥분의 장이었던 Intichiuma
축제를 통해 공동체에 대한 헌신, 연대감, 새로운 도덕적 이상의 탄생을 지켜본 것처럼,
2002 / 2006 월드컵 당시 우리의 ‘붉은 악마’들도 축구를 일종의 공동체적 정화의식을 치러내는
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이 반드시 좋은 것일까? 우리는 축구를 통해
이뤄진 사회적 통합을 독재정권의 유지나 사회적 갈등을 은폐하는 데 이용한 숱한 독재정권을
기억하고 있다. 남미가 그랬고, 전두환 정권이 그랬다. 그러나 순수 프랑스인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이민 2세 등을 대거 포함시켜 1998년 월드컵 우승컵을 거머쥔 프랑스의 예는
축구가 인종이나 계층에 따른 차이와 갈등을 사회통합으로 이끄는 긍정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국가 간 축구경기는 가장 첨예한 논란거리이다. 흔히 ‘축구전쟁’으로 부르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간 전쟁처럼 축구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숱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축구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싸움을 그치게 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질
못했다”
며 스포츠의 평화적 기능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남미의 좌파
지식인 Galeano는 “눈물이 손수건에서 오는 게 아닌 것처럼, 축구에서 야기된 폭력은 축구
때문이 아니다”
고 말했다. 축구는 구실일 뿐 전쟁의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4년 성탄절 때 축구경기를 한 영국군과 독일군처럼,
영토문제에 있어 어떤 합의점도 찾지 못하다 단일 올스타축구팀을 구성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예처럼, 2006 독일월드컵 본선 진출로 휴전에 합의한 아이보리코스트의 정부군과 반군처럼,
축구는 적대국간 전쟁을 유보시키기도 한다.


20세기는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마무리 된 전쟁의 세기였다. 따라서 국제 사회는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다가오는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만들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바램과는 달리 21세기 역시 전쟁으로 시작되었고, 9년이라는 짧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여러
차례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없는 지구 만들기 노력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축구를 통해 평화가 증진될 수 있을지의 여부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오늘날
축구는 세계인이 즐기는 global game이 되었다. 축구가 global game이 되었다함은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달라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큰 어려움 없이 함께 어울려 축구를 할 수
있고, 경기를 관람할 수 있으며, 자신이 관람하고 있는 선수들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해서 축구는 국경, 피부색, 언어, 종교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이를 통해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켜주는 보편 언어의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예컨대
Yallop은 축구가 아름다운 경기이며, 계급이나 인종의 구분 없이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주고, 세계 공통의 언어를 제시했으며, 소중한 이상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언어란
대화 수단이며, 대화는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합리적인 방식이다. 만일 축구가 언어의 기능을
할 수 있다면, 축구를 통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고, 결국 축구는 평화정착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Gaffney는 스포츠적 경쟁을 언어의 한 형식으로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스포츠적 경쟁과 대화 사이에는 큰 간격이 가로놓여있다. 양자 모두 인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공통의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상호작용의
방식과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차이점도 크다. 축구가 몸짓을 통한 상호작용이라면 대화는 언어를 통한 상호작용이며, 축구가 추구 하는 목적이 승리라면 대화가 추구 하는 것은
갈등의 평화적 해결에 요청되는 합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축구경기와 대화를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
평화에 기여할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역사가 그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여는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우리들의 의지가 선행되어야만 효력을 지닐
수 있다.
정치권력의 유지나 경제적 이득의 획득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축구가 조직되고 운영될 때, 축구는 우리 시대의 그 어떤 문화적 교류 못지않게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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