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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동대문운동장, 콜로세움처럼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을까?

글 / 손 환 (중앙대학교 교수)




동대문 운동장!
축구와 야구 등 스포츠를 좋아하는 한국인치고
동대문 운동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애교심과 애향심의 발로, 나아가 애국심을 불타오르게 했던 곳,
그곳이 바로 동대문 운동장이다.

그런데 한국근대스포츠의 메카로서 한국인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동대문 운동장이 2008년 83세의 나이를 먹고 역사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러한 동대문 운동장을 탄생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일생을 통해
과연 한국근대체육사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또한 유럽의 콜로세움처럼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동대문 운동장의 건설

동대문 운동장은 우리의 뼈아픈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는 바야흐로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일본의 동궁(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
결혼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성 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다.
이것은 경성 운동장 사용조례(제1조)의 “경성 운동장은 1924년 동궁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운동장을 말한다”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림 1. 경성운동장 평면도



경성 운동장은 경성부의 토목기사인 오모리(大森)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그 구조를 보면 총면적 22,700평, 총 공사비 155,000원(약 34억), 총 수용인원 25,800명이며
육상경기장 8,500평(15,000명), 야구장 5,500평(7,000명), 정구장 1,000평(3,900명)으로 되어 있다.

2. 한국근대체육사적 의미

동대문 운동장은 1925년 종합경기장의 면모를 갖춘 경기장으로서
개장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각종 체육단체, 각급학교, 언론기관에서 주최한
축구, 야구, 정구, 육상, 종합경기 등 전국규모의 대회와 올림픽 및 월드컵축구대회의
출전을 위한 예선전 등의 각종 경기대회가 개최
되었다.


                                                         그림 2. 경성운동장 전경


그러므로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근대스포츠의 메카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한국스포츠가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스포츠의 발전과 행보를 같이한 역사적인 무대로서
유서 깊은 스포츠시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근대스포츠의 산실로서 83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우리민족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으로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동대문 운동장은 비록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우리민족과 동고동락을 함께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대문 운동장을 단순히 철거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후손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할 수 있도록 정부나 관련부처,
그리고 체육단체 및 체육인들의 지혜를 한 곳에 모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스포츠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