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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재조명해야할 체육인 서재필의 삶

 

 

글 / 김학수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송재 서재필(1864~1951) 선생 동상과 독립문이 함께 세워져 있다. 말쑥한 양복 정장차림에 코트를 걸치고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매. 우뚝 선 채 입을 앙다물고 있는 그의 동상에서 시대의 선각자로서의 호연지기를 느끼게 한다. 서재필 동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오른손에 쥐고 독립문을 향해 손을 들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같은 모습은 서재필 선생이 독립신문, 독립문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자로 독립협회를 주도하고 국민적 계몽의 씨앗을 뿌리고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떠 독립문을 건립하도록 했다.

 

어릴 적 서울 시내에는 많은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남산공원 백범 선생 동상, 안국동 로터리 민영환 선생 동상 등 주요 로터리나 공원, 광장 등에 역사를 빛낸 위인들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민족주의 사관과 국가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학을 하면서 서재필 선생 동상과 독립문을 보며 자연스럽게 구한말 역사공부를 했던 것이 떠오른다. 버스를 타고 등하교 때 보게 되는 서재필 선생 등의 기념물은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속의 인물을 어렴풋이 알게 했다.

 

서재필 선생과 독립문은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는 구한말 가장 깊고 폭넓은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금맥같은 스토리로 웅대한 스케일의 TV 대하드라마 같은 일대기로 점철됐다. 갑신정변 쿠데타 주역, 무인, 연설가, 독립투사, 기업인, 의학자, 언론인·. 특히 그는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이며 첫 미국 시민권자였다. 1884년 개화와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해 김옥균 등과 함께 약관의 나이로 갑신정변을 주도했으나 실패한 뒤 역적으로 몰려 생면부지의 땅 미국으로 망명해 낯선 영어를 익히며 한국인 최초로 서양의사가 됐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필자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 정도의 역사적 사실은 웬만한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듯하다. 하지만 최근 언론인 출신 고승철씨의 장편 소설 서재필을 읽으면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고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체육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서재필 선생의 행적을 사료와 증언에 따라 재구성하고 확인되지 않은 대목은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운 소설 서재필에서 그가 체육인이었다는 사실이 세세하게 잘 설명돼 있었다.

 

  고승철씨는 책머리말에서 서재필은 자전거를 처음 갖고 와 탔고 야구도 최초로 보급했다. 아마 골프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치지 않았을까하며 그가 체육인임을 분명히 밝혔다. 서재필 선생이 체육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한국체육사의 최고 전문가 이학래 전 한양대 교수의 대표적인 책 한국현대체육사에도 서재필 선생의 체육활동 경력은 전혀 언급이 없었다.

 

소설에서 미국 해리 힐먼 고등학교 재학 시절 서재필 선생은 야구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로 활약하며 학교 대표로 이름을 날렸다. 교장 부인의 친정아버지 권유로 골프를 치기도 했다. “힘껏 휘둘렀으나 허공을 치고 말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곰곰 따져보니 검법원리와 같다. 기를 모으려면 인위적인 힘을 넣어서는 안된다. 단전으로 호흡하며 골프채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일순간 쉬는듯하다가 채를 경쾌하게 휘둘렀다. 원심력을 이용했다. 휘익! 바람을 가르며 공이 솟아 250야드나 날아갔다.”(188) 야구경기장면도 소개했다. 갑신정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뒤 대학을 졸업하고 사면을 받아 귀국한 서재필 선생이 1896년 배재학당에서 아펜젤러 목사와 학생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과 야구를 하는 모습이었다. “서재필이 투수를, 아펜젤러가 포수를 맡아 공을 던지고 받았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배트를 쥐고 타자 역할을 맡도록 했다. 이승만은 배트를 열심히 휘둘렀으나 번번이 헛 스윙했다. 소박하나마 이것이 이 땅에서 야구가 처음 소개되는 광경이었다.”(285)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의 고문으로 특별 귀국한 서재필 선생은 좌우익 대립이 극심한 소란한 정치집회는 참석을 거절하는 대신 체육단체에서 초청하면 기꺼이 응했다. 대한체육회가 창설될 때 고문으로 모시겠다는 제의가 들어와 흔쾌한 수락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야구대회에서 시구를 맡기도 했다. 투수마운드에 서재필이 야구 모자를 쓰고 올라서자 2만여 관중이 우레 같은 박수를 쳤다. 여든이 넘은 노인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의 몸은 유연했다. 힐먼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배운 투구 포즈를 잊지 않았다. 글러브에 공을 서너 번 툭툭 던지고 꺼낸 다음 오른팔을 쭉 뻗어 우아한 포즈로 공을 던졌다.” (429) 서재필 선생은 의사 경험을 토대로 마라톤 선수 최윤칠(1950년 보스턴마라톤 3)의 과학적인 근육 관리를 지도했으며, 김계현 전 야구대표팀 감독에게 미국 야구 이론책을 건네주기도 했다.

 

서재필 선생의 체육인 활동 경력은 체육인들에게 새로운 감동과 흥미를 느끼게 하며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뒤늦었지만 체육인으로서의 재발견을 기화로 서재필 선생에 대한 체육인으로서의 삶을 새롭게 조명할 것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