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 -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①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로 한정되지 않고, 경기를 관람하는 스탠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경기장 밖에서도 벌어진다. 축구를 논할 때 서포터들의 집단응원은 빼놓을 수 없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승부는 경기 성적에 반영되지 않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호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승패와 직결되기도 하며 극단으로 흐를 경우, 오히려 이긴 쪽에 더 불리한 조치가 따르기도 한다.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간접적으로나마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심판들에게도 심리적인 영향을 미쳐 승패를 좌우하는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들은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지만 그라운드에서 뛸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을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는 또 다른 선수라는 의미로 ‘12번째 선수’라 부른다.
오늘날 국가대표팀을 포함해 클럽팀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지간한 아마추어 팀들도 응원단(서포터즈)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통상 이들에게도 한둘의 라이벌은 있고, 이 둘의 한 판 승부는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경기와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다.
축구의 역사 가운데 응원 문화는 비교적 초기부터 있어 왔으나 그 시작에 관하여는 유럽기원설 내지는 남미기원설 등 여러 주장이 있어 딱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조직적으로 응원하기 시작한 것은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잉글랜드가 아니라, 1950년 구 유고연방(현재의 크로아티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챔피언 결정전(하이두크 스플리트<Hajduk Split> vs FK 츠베르나 즈베즈다<Fudbalski Klub Crvena Zvezda>의 경기)에서 스플리트의 서포터인 토르치다(Torcida, 포르투갈어로 ‘전진’을 의미함.)들이 그저 관중석에 앉아 경기만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어나 횃불을 밝히고, 구호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경기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그 시초다. 유고의 한 경기장에서 시작된 새로운 관전 문화와 열혈 팬의 등장은 인근 국가를 거쳐 유럽 전역에 신선한 충격으로 전파되었고,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져 오늘날의 다양한 각 국의 서포터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유럽(유고슬라비아)에 위치한 축구팀의 서포터가 포르투갈어 이름을 쓴다는 것이 왠지 수상하다. 특히, 둘 사이엔 연관이 되는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어서 그 일은 포기하려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책에서 실마리를 풀었다. 사실 같은 이름을 가진 서포터는 브라질에 더 많다. 토르치다는 ‘변경하다, 바꾸다, 빗나가게 하다.’는 의미의 포르투갈어 ‘torcer’에서 유래했는데 말 그대로 단순히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넘어 자기 팀에겐 열정적인 응원을, 상대에겐 거친 야유를 보내 양 팀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쳐 유리한 방향으로 경기를 이끌고 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우리가 서포터를 12번째 선수로 부르는 이유이자 배경이 된다. 책의 저자에 따르면 토르치다의 시초는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경기에 쓸 물건들을 사는 마을 주민들의 친목 모임이 생겨나면서 부터였는데 점차 조직화, 거대화, 정기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브라질 전역에 보편화되었다고 하고, 결정적으로 1950년 브라질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를 통해 유럽에 소개되어 급속히 전파된 것이라 한다.(이준석, 2011년) 정리하면 축구 서포팅의 역사는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 남미에서 비롯해 유럽을 거쳐 세계로 전파되었고, 가장 현대적인 의미의 서포터는 구유고 연방이 발상지로 보면 틀림없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름 전쟁과 축구의 역사를 연구했고, 둘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을 주장하는 필자에게 다음에 소개할 그림과 사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각 각은 고대와 중세에 가장 인기 있었던 스포츠 경기의 한 장면들을 담았는데 축구로만 그 범위를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서포터의 기원은 앞서 언급한 그 정도가 아니라 상상하는 이상으로 오래되었고, 그 원천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영역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3세기에 그려진 중세 기사들의 토너먼트 장면으로 뒤에 보이는 귀부인들은 마상창시합에 빼놓을 수 없는 VIP 관중이자, 경기 후 우승지에 대한 시상자로 참석했는데 기사들의 결투를 가장 잘 관찰하고, 기사와 말의 거친 숨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최적의 관람석에 모셨다. (사진출처 : http://ko.wikipedia.org/ )
위의 그림들은 중세 기사들의 토너먼트 장면이다. 인류사 가운데 말이 등장한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으나 서양 전쟁의 역사에서 말의 등장은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로 동양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다. 잠깐 과거의 전쟁양상을 대관(大觀)해 보면 고대에는 ‘중무장한 보병’(이를 호프라이트<Hoplite>라 함.)들에 의한 전투가 주였지만 중세에는 ‘말 탄 기사’들이 전장을 누볐다. 중세 봉건영주들에게는 보병에 비해 몇 십 배의 전투력을 가진 기사들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30kg이 넘는 전신 갑옷과 투구를 입어야 하는 기사와 그들의 다양한 전투 장비를 마련하고, 기사들을 태우고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말들을 준비하며 이를 관리하는 시종들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은 너무나 막대1)하게 들었기 때문에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세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군사력의 사용 범위를 축소하는 이른바 ‘제한전쟁(Limited War)’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사들은 전투에서 비록 적이라도 가능한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생포해 포로로 삼고, 이후 협상에서 몸값을 받고 풀어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이런 전쟁양상과 관행으로부터 기사들의 스포츠인 ‘토너먼트(Tournament)’ 경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 기사들에게는 최소 세 마리의 말이 필요했는데 전쟁터까지 태워주는 말, 짐만 별도로 운반하는 말 그리고 전쟁터에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말이 별도로 필요했다. 기사들을 태우는 말은 최소 100kg이상의 기사를 태우고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건장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의 유럽에는 중세부터 기사들에게 말을 제공했던 도시들(안달루시아, 슈투트가르트 등)이 많았음은 물론, 이 도시들은 세계적인 명마들을 생산하는 상징들을 지명이나 문장에 활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세 유럽의 전 지역을 거의 미치게 할 정도로 인기 있었던 이 결투는 스포츠였지만 평시에 전시를 대비한 기사들의 훈련이기도 했다. 토너먼트에는 전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두 기사가 말을 타고 긴 창(lance)으로 상대방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가르는 일대일의 경기와 기사들이 집단으로 싸우되 말을 타고 하거나 땅에서 하는 경기로 구분해 진행되었다. 이를 상창시합 ‘쥬스팅(Jousting)’, ‘멜레(Melee)’ 그리고 ‘토니(Tourney)’라 불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경기들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신분이 높은 기사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유하고, 평판이 있는 소수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알겠지만 중세 토너먼드를 소재로 한 역사화를 보면, 예외 없이 경기장 뒤편에 예외 없이 관중석에서 기사들의 결투를 지켜보며 손이나 손수건을 흔들고 심지어는 응원하는 기사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통상 스탠다드<standard> 보다는 작은 배너<banner>)을 흔들며 수다를 떠는 한 무리의 여자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귀족 또는 왕족의 부인들로 경기를 마치면 우승한 기사에게 화관(花冠)을 하사하는 시상자이며 기사들의 열렬한 팬이자 애인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중세 토너먼트에 출전한 기사들을 후원하거나 응원하는 귀족들과 귀부인 그리고 봉건영주들이 오늘날 서포터의 원조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서포터의 처음은 아니었다.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펼쳐진 검투경기(영화 글라디에이터의 한 장면)와 1872년 장 레옹 제롬이 그린 ‘내려진 엄지<Pollice Verso>’라는 그림으로 관중석에서 이들을 후원하고, 응원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들은 생명을 걸고 전투에 참가한 전사들을 응원했던 오늘날 서포터들의 진정한 원조다.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schultz105/247 )
중세 기사들의 경기 보다 훨씬 이전부터 행해졌던 격렬한 스포츠 경기가 있었다. 위에 보는 바와 같이, 고대 로마에서 성행했던 검투사(gladiator, 글라디아토르) 2)들의 경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검투경기의 역사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나 그리스의 도시국가 에트루리아(Etruria)인들이 신에게 바치던 의식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고대 이탈리아(파에스툼) 무덤의 벽화와 역사가 리비우스의 서술을 근거로 볼 때, 최초의 시작은 기원전 4세기 정도로 추정되며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경기는 기원전 264년에 열린 추모경기였다. 기원전 2세기 원형투기장이 건설되면서 검투경기는 더욱 성행했다. 대부분 죽은 고인(故人)을 추모하기 위해 개최된 이 경기는 점차 추도 목적 보다는 단순 볼거리로 전락해 결국 위정자들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는 일환으로 선심성 이벤트처럼 애용되었다. 그래서 역대 로마 황제들은 로마 시민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선대의 황제들과 경쟁적으로 검투경기에 집착했다. 그리하여 기록에 의하면 1년 중 무려 100일 동안, 하루 5만에서 6만 명이 관람하는 경기를 축제처럼 개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병행해 황제들은 검투경기의 다양한 재미와 짜릿함을 극대화하는 종목을 개발했고, 최신 시설을 갖춘 경기장 건설에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네로에 이어 9대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재위기간 : 69∼79년)는 폭군정치를 일소(一掃)하기 위해 네로가 시민들에게 빼앗은 재물로 지은 ‘황금의 궁전’ 자리에 세운 ‘콜로세움(Colosseum)’도 정치적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계획된 조치였다. 또한 후대에 들어 40도가 넘는 여름에도 경기 관전을 위해 경기장에 그늘을 제공하고,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해 ‘관람석(카베아<cavea>)’ 위에 ‘차양 막(벨라리움<velarium>)’을 설치하기도 했다. 뿐 만 아니라, 시 외곽에서 수도교를 이용해 물을 끌어 들여 배를 띄우고, 최대 2만 명이 참가하는 ‘모의해전(나우마키아<naumachia>)’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경기의 재미와 신비스러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하에 도르레를 설치해 투사와 맹수들이 경기장으로 직접 올라올 수 있는 오늘날의 ‘엘리베이터(히포지움<hypogeum>)’도 28개나 만들었다. 경기장 바닥은 희생자들의 피를 흡수하기 위해 모래를 깔았고, 이 모래는 매일 새 것으로 치환해 세심한 부분까지 최상의 상태르 유지하려 했다. 참고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기장은 물론이고, 영국에 있는 멋진 공연장(웸블리 아레나)의 이름에도 꼭 들어가는 ‘아레나(arena)’는 고대의 검투사들의 경기장에서 유래한 것이며 당시 경기장 바닥에 깔았던 모래를 일컫는 라틴어 ‘하레나(harena)’가 변형된 것이기도 하다.
2) 일반적으로 고대 로마의 검투사를 뜻하는‘글라디아토르(gladiator)’라는 이름은 제 2차 포에니 전쟁 중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이 히스파니아를 점령했을 때, 당시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검인 글라디우스(Gladius, 히스패닉 스워드라고도 함.)를 로마 군대의 검으로 채택한 것에서 유래했다. 다시 말해, 글라디아토르는 ‘글라디우스를 쓰는 사람’을 뜻한다. 60cm 남짓한 양날의 단검인 글라디우스는 로마 군단과 함께 제국 건설의 선봉에 섰고, 그 결과 전쟁의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살상기록을 가진 무기로 평가된다.
검투경기가 있을 때면 로마의 시민들은 무료로 초대되어 최신식 시설과 편의를 제공받는 가운데 황제가 공짜로 나눠주는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피의 향연을 맘껏 즐겼다. 로마 최대의 이벤트를 준비한 황제들은 경기장에 자주 그 모습을 나타내며 자신이 ‘로마 최고의 정점’에 있음을 만인에게 널리 알리고, 국민들과 접촉하면서 직접 의사를 들고 소통하는 등 검투경기를 정치적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그러나 콜로세움 경기는 단순히 오락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당시 스타 검투사들은 로마의 주적(主敵)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하고, 복장도 그들과 유사하게 입고 경기에 참가해 독특한 이미지를 연출했다. 물론 여기엔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이는 적국의 유명한 장수와의 결투를 통해 로마전쟁을 재현하고, 로마신화를 상기시켜 로마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시키려 했던 것이다. 대부분 전쟁의 포로나 노예, 범죄자 및 일부 자유민으로 구성된 검투사들은 결투에 나가 전적을 쌓으면서 인기를 얻었고, 시민들에 의해 칭송되었으며 이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따리서 이들은 경기에 임해 죽지 않기를 희망하는 여러 사람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평시에 전시를 대비했던 올림픽 제전에서도 도시국가를 대표해 출전한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했던 서포터들도 포함하는 것이 맞겠으나 상대적으로 다른 두 사례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직적이지는 않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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