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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축구의 발전은 더비에서 비롯되었다 (5)


글/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발전은 더비에서 비롯되었다.


⑨. 좀 더 특별했던 우리의 더비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는 북한과 체제 경쟁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그리고 사기 증진을 위해 군에서 했던 독특한 축구 더비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965년 잉글랜드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한 수 위인 북한과의 경기를 피하기 위해 고의로 지역 예선에 불참해 세계축구협회에 벌금을 물기도 했었다. 1966년 월드컵 본선에 오른 북한이 강호 이탈리아를 꺾으면서 8강에 진출해 포르투갈과도 대등한 경기로 석패하자 당시 북한과 치열한 이념적 체제경쟁 중에 있던 대한민국 정부로써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특단의 대책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월드컵이 끝난 이듬해 곧바로 당시 중앙정보부장(김형욱)의 주도하에 ‘양지(陽地)축구단’을 창설했다. 이 이름은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의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는 슬로건에서 따 온 것이다. 선수영입은 군에 입대했거나 군 입대를 앞둔 연령대의 축구선수들을 모아 국영기업체 중견 간부 수준의 봉급도 지급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등 105일간의 전지훈련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은 1.21사태로 불리는 ‘청와대 기습사건’을 필두로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그리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굵직한 도발행위로 촉발된 긴장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1969년에는 북한과 획기적인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축구에 대한 관심도 떨어졌다. 아울러 팀 창단에서부터 후원을 책임졌던 중앙정보부장의 실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포로축구팀 양지’는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고, 1970년에 이르러 해체되고 말았다. 비록 북한 축구팀과의 맞대결은 없었지만 대한민국 축구사(史) 가운데 가장 현대적인 의미의 축구클럽이었던 양지축구단은 분명 한국 축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군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침체된 군의 사기를 증진할 목적으로 육·해·공군과 해병대가 자체적으로 스포츠를 적극 장려해 스포츠는 물론 군의 활성화에 한 몫을 담당했었다. 군에서 만든 축구팀은 고유의 이름이 있었는데 육군은 웅비(雄飛), 해군은 해병대의 축구팀을 모태로 한 해룡(海龍), 공군은 성무(星武)라는 이름의 축구팀을 운영해 치열한 맞수 삼파전을 가졌고, 국군체육부대의 창설과 함께 웅비(雄飛)팀으로 통합되었다가 상무(尙武)팀으로 개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나 군의 사례 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관학교에는 입학생 중에서 선발한 진짜 아마츄어 선수들로 구성된 축구팀과 그들의 정기 대항전이 있었다. 매년 9월 셋째 주에 열리는 연고전 또는 고연전에 버금가는 호국 간성(干城,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나 인물을 이르는 말)들의 스포츠 제전인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매년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10월 2일부터 3일간 축구와 럭비를 주축으로 육상경기와 각종 상무행사(태권도 시범, 민속놀이, 모형비행기 날리기 등)들이 열렸다. 원래 국군의 생일은 군별로 달랐다. 그러나 1956년 국무회의에서 한국전쟁 당시 3사단 23연대가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돌파해 북진(北進)한 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고 국방부 주관으로 대내외에 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국가 안전보장과 군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을 포상하며 군인들의 사기진작과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시가행진, 군악연주회 등을 포함한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3군사관학교체육대회는 역시 국군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는데 1954년에 첫 대회가 있었으니 그 역사가 꽤 깊은 편이었다.



3사단 23연대가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장면과 이를 재현하는 행사 포스터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연고전이나 고연전과는 달리 순수 아마추어들이다.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에서 축구는 잘 하면 좋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특기생을 선발하지 않는다. 때문에 입학 조건에 학창시절 축구 경력은 중요하지 않았으며 장교가 될 수 있는 자질만이 중요했다. 그래서 입학 자격을 갖춘 생도들 가운데 축구에 소질이 있는 소수를 선발해 훈련시켰기 때문에 경기수준은 형편없이 낮았다. 조기교육은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고, 오로지 동네축구와 학교에서 반 대항 축구가 전부였던 18∼20세의 늦깎이들을 모아 단기 속성으로 양산하다 보니 그 실력이래야 보잘 것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도 기술은 형편없이 모자란 대신 힘과 체력 그리고 정신력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 부족한 경기력을 무형의 전력으로 보완해 간신히 고등학교 팀들과 대적할 수준(물론 평균 이상은 된다.)은 된다. 이런 이유로 축구더비는 경기 보다는 생도들의 젊음과 패기 그리고 절도 있는 응원전이나 매스게임이 훨씬 볼만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고작 두 경기(다른 사관학교 팀과의 경기 수)를 위해 일 년 동안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오히려 생존을 위한 인내의 시간이라 해야 좀 더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을 보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축구에 소질이 있지만 힘든 선수생도를 의도적으로 기피했던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여서 “선수생도에 선발되지만 않으면 오복 중 하나”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 일 년을 준비해 단 3일에 보이는 축제에 기껏 해봐야 구력 1∼3년 정도 된 선수들이 학업과 훈련을 병행하며 간신히 습득한 설익은 기술이 전부였기 때문에 오히려 경기 내내 일사불란하게 펼쳐지는 응원전이 더 볼 만한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공 다루는 솜씨가 서툴고, 그들의 기계적인 몸짓이 왠지 거부감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단순히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서툰 몸짓은 단순한 흥미와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뭔가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흥분’과 함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제 역사 속의 일이 되어 버렸다. 오랜 전통과 제도를 없애기는 쉬워도 다시 부활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관생도가 되어 4년간 축구를 했던 한 사람으로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더 이상의 언급과 개인적인 생각과 주장을 추가하지는 않겠지만 아래 미국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저 이 책을 읽은 독자들만이라도 한번쯤 관심을 가져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그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3군사관학교체육대회 장면(선수입장, 축구, 육·해·공사 통합 매스게임)과 시상식 장면(1999년)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사관생도들의 경기는 있지만 ‘3군사관학교체육대회’와 같은 종합 제전은 없고, 종목별 경기는 매년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규모의 축제 형태로 개최한다. 그 대표적인 경기가 바로 미 육군사관학교(West Point)와 해군사관학교(Annapolis) 간의 축구경기인 “Army-Navy Football Game”가 그것이다. 1890년에 시작된 이 축제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매년 두 학교의 중앙에 위치한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다. 우리처럼 화려한 매스게임은 없지만 양측 사관생도들의 입장과 퍼레이드, 밴드연주, 고공낙하 시범, 공군 전투기와 육군항공(헬기) 편대의 축하비행 등 다양한 식전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대통령이나 부통령이 귀빈들과 함께 자리하고, 주최 학교장의 안내를 받아 시축으로 경기를 시작한다. 경기 모습은 매년 공영방송에서 생방송으로 미국 전역에 중계해 모든 국민들이 함께 관람하고, 즐기며 응원하는 국가 축제다. 2011년에 열린 제112회 대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그들의 축제를 한 번이라도 본다면, 미국의 세계 초강대국 위상을 이끈 군을 널리 홍보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기꺼이 생명과 젊음을 바쳐 헌신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군에 대한 국가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그리고 무한 존경을 보내는 행사라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런 축제를 무려 114년 동안 지속해 왔음은 놀라움과 부러움 그 자체다. 아래 사진들은 2010년과 2011년의 대회 장면을 담은 것들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그들의 제전은 중요하고,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30년 전, 지금은 없어진 성동원두1) (여기는 경평전·연고전·한일전 등 우리나라의 더비경기가 열렸던 축구 역사의 산실이다.)에서 미드필더로 뛰었던 필자에겐 너무나도 질투 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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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동원두(城東原頭)

말 그대로 ‘서울 도성 동쪽의 넓은 벌판’이라는 의미로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일대에 위치한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의 별칭이다. 경평전이나 연보전 등 축구 더비매치를 비롯해 수많은 국내·국제 경기가 벌어졌던, 우리나라 현대 스포츠의 메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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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Army Black Knights                                                           Navy Midshipmen


ⓐ 2010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11회 대회의 개회식 장면과 사관학교의 상징 

ⓑ 2011년 제112회 대회의 시축을 위해 입장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해사교장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하는 장면 ⓒ 2011년 경기와 승리한 해사생도들의 세리모니  

   ※ 출처 : http://blog.daum.net/westpointkpc/73


이제 우리의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동서고금에 축구를 통해 부국강병을 도모(로마의 하르파스툼이나 중국의 츄슈는 모두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군인들을 훈련시켰던 정식 훈련종목이었다.)하고, 전쟁에 대비했던 상무(尙武)정신’ 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 환갑이 훨씬 넘은 육·해·공군 사관학교 출신 할아버지 선수들이 모여 40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서울 종로구 소재의 지하의 허름한 전통 한식당에 모여 여전히 당시의 경기를 회상하며 3군사관학교 OB체육대회를 하고 있다. 물론 이 식당의 메뉴는 삼사체전은 물론 국가대표 팀의 경기와 세계 최강 팀의 경기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 등의 사유로 선수들이 줄고 있어 여간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소개했던 ‘연고전 또는 고연전’, ‘경평전’ 그리고 ‘3군사관학교체육대회’까지 우리나라의 축구 더비는 우리 민족의 발자취 그 자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가운데 연고전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이미 사라졌지만 최근 경평전을 다시 재개할 움직임이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경색된 남북관계 탓에 어려움도 있겠지만 서울시장이 평양시에 경평전 개최를 공식 제안하면 논의가 본격화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전의 이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축구는 정치, 외교, 전쟁 등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기 때문에 축구의 위력을 이용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만약 경평전이 재개되면 우리나라의 축구 더비 가운데 외롭게 남은 사관생도들의 제전도 가까운 미래에 부활돼 함께 푸른 잔디밭을 달리는 꿈도 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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