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발전은 더비에서 비롯되었다 (3)
3. 우리나라의 만족정신을 담은 축구 라이벌전
우리도 세계적인 더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근대적인 축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1882년의 일이다.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했던 영국의 해군군함 ‘플라잉 피시’호(號)의 승무원들이 배의 갑판에서 그리고 연안의 부두에서 공을 찬 것이 대한민국 축구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본격적인 축구의 시작은 영국처럼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적인 학교가 건립되면서 ‘학교체육’의 일부로 뿌리를 내렸다.
1900년대에 들어, 프랑스 교사인 마델에 의해 학교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후 ‘배재학당’(1902년)을 필두로 대부분의 학교에 정식으로 보급되었고, 우리나라의 근대 스포츠 형성에 있어 메카 역할을 했던 ‘황실기독청년회’(1904년, 현재의 YMCA 전신), 그리고 ‘대한체육구락부’(1905년) 등에 축구부가 생겼으며 황실기독청년회와 대한체육구락부 간에 열린 경기가 가장 최초의 공식 경기로 기록 되었다. 과거 중국에서 전파된 축국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의 근대 축구는 영국으로부터 전파된 이래 민족의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국기(國技)가 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자 축구는 무서운 속도로 대중 속에 스며들어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의 의지를 대변했다. 이 때 생긴 유명한 더비가 있다. 1927년 전조선축구대회 준결승에서 만난 사학의 명문인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의 대항전은 양교 이름의 앞 자를 따서 연보전<延普戰> 또는 보연전<普延戰>이라 불렀고, 1929년부터 경성(서울)과 평양의 시(市) 대항 정기전이 ‘경평전(京平戰)’이란 이름으로 생기면서 축구 더비가 전 조선을 흥분시켰다.
연보전 또는 보연전(이하 연보전)은 학교의 자존심을 걸고, 최선을 다해 승부를 가늠하는 차원을 넘어 조국을 잃은 젊은 청년들의 울분을 달래고, 자유를 꿈꾸는 장소였고, 경평전은 온 국민을 하나로 뭉쳐 일제의 탄압에 강력 저항하자는 의지를 다지는 공공연한 집회가 되었다. 당시 대회를 주최하고 후원했던 조선일보사의 부사장은 개회사에서 "축구경기는 부지중에 민중적 차원으로 화합하자는 데에 그 취지가 있어... 그저 축구 한 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기회로 승화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이 내용을 신문 사설(1929.10.8.일자 조선일보 사설)에 싣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경평전은 일제의 억압 하에 있는 민족의 대동단결과 항일(抗日)정신을 고취하는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양 팀은 창단 당시 썼던 ‘축구단’이란 이름도 버리고, 대신에 ‘군(軍)’을 붙여 ‘전경성군(全京城軍)’, ‘전평양군(全平壤軍)’으로 불렀는데 이는 비록 스포츠 경기였지만 일제와 싸우는 민족의 군대란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만으로도 일본에겐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터인데 여기에 설상가상의 사건이 터지면서 일본은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에서 열린 ‘제1회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와 ‘제8회 명치신궁경기대회’에서 경성축구단이 유수의 일본 팀들을 물리치며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결승에서는 무려 다섯 골 차로 압승을 거두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인들은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견제와 통제를 점점 그 수위를 높이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축구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두 가지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하나는 동적이고 폭발적인 축구의 저변 확대를 막기 위해 보다 정적인 야구를 널리 보급하고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이 조치로 순식간에 야구팀이 급증했는데 1940년까지 두 종목의 고교팀 숫자를 비교해 보면, 뒤늦게 들여 온 야구팀이 20개 학교에서 채택한 반면, 축구팀은 불과 12개교에 그치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 정책의 치밀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당시 파급된 폭발적인 축구의 인기를 잠재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1934년에 들어서자 일본은 ‘축구 통제령(蹴球 統制令)’이라는 최고의 강수를 꺼냈다.
중세 영국이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훈련(활쏘기)을 열심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축구에 빠져 이를 게을리 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축구 금지령을 내린 것은 이해되나 일반적으로 식민지 국민들이 나라를 찾는 일보다 노는 일(축구)에 빠진다는데 이를 막을 이유는 없기 때문에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의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그 무엇이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하여튼 축구금지령을 관철시키려는 일본은 조만식 선생을 주축으로 한 민족지도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법 제정은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우리의 경성-평양 간 축구더비는 더욱 활성화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던 1942년 미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코너에 몰린 일본은 축구를 포함해 ‘문화말살정책’을 관철시킴으로써 모든 축구경기가 금지되었다.
이 두 더비매치가 재개된 것은 해방된 이듬해(1946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였다. 이후 연보전 혹은 보연전은 연고전 또는 고연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나 경평전은 38선으로 남북 통행이 금지되면서 더 이상 경기를 존속하지 못하다가 1990년과 2002년에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이벤트성의 경기만 세 차례 치렀다.
경평축구대항전 시작 전, 양 팀 선수들의 입장 장면(1933년, 사진출처 : 대한축구협회)
1929년에 시작된 경평전은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대회 개시 2년 동안 양 팀은 승패를 주고받으며 맞수로 팽팽한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3회 대회에서는 두 팀의 열기가 너무나 고조되면서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빈번하게 충돌했고, 급기야는 응원단까지 가세해 대규모 싸움으로 번지자 대회는 이내 중단되고 말았다. 3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대회는 봄과 가을에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정기전을 개최하기로 정하고 1933년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불거진 판정 시비로 1935년에 다시 막을 내리고, 대신 서울-평양-함흥을 주축으로 한 ‘도시대항축구대회’가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1942년 모든 축구가 금지된 이래로 대회가 해방을 맞이해 다시 재개되었지만 한국 축구 최초의 더비 매치로 손색없는 경평전의 운명은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당시 경기는 3일간 3차전으로 진행했는데 2차전 도중 관중들의 충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결국 경찰이 공포탄을 쏴 경기를 해산시킴으로써 3차전은 열리지도 못한 채 경평전은 막을 내렸다. 축구가 금지된 기간 중 일본은 또 다른 꼼수를 냈는데, 우수한 우리 선수들로 약한 일본 팀을 보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축구협회는 일장기를 달기 보다는 오히려 선수단을 해체하는 쪽으로 결정해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고, 선수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만, 한국 축구의 산증인, 김용식 선수만이 손기정 선수와 함께 베를린 올림픽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바 있다.
(A) (B) (C) (D)
서울에 연고한 팀 가운데 경성축구단 창설(1933) 이전부터 활동했던 조선축구단(1918년 창단)이 있었다. 1920년대 조선축구단은 경성축구단과 맞수로 활약했는데 이 둘의 대결 구도는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출신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보전의 대결로 이어졌다. 그 이유는 팀의 선수 구성에 있었다. 조선축구단은 보성전문 출신의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 반면, 경성축구단은 연희전문 출신의 선수들이 주축이었다. 유니폼도 조선축구단은 적색(칼라가 없었던 시기라 흑색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과 백색의 세로 줄무늬를 이은 유니폼을 착용했고, 경성축구단은 진홍색 바탕에 승리의 상징인 흰색 V자를 새겨 넣었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 양교의 유니폼에 고스란히 남아 후배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해방이후 본격적인 라이벌로 더비를 벌였던 두 성인축구팀, 가장 왼쪽이 보성전문학교 출신 선수를 추축으로 구성된 조선축구단(A)이고, 두 번째가 연희전문학교 출신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경성축구단(B)이다. 이들의 더비는 역사와 전통이 깊은 사학의 명문들의 정기전으로 이어졌고, 유니폼도 양교에서 그대로 계승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려대학교는 적‧백색의 줄무늬 유니폼(C)을 입고 있으며 연세대학교는 가슴에 'V'자를 학교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Y'자로로 바꿔 새겼지만 전체 디자인은 예나 다름이 없다. 흑백 사진과 칼라사진을 비교해 보면 80∼90년 전에 입었던 유니폼은 디자인이나 모양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흑백사진은 구분되지 않으나 심지어 색깔도 유사하고, 이 상징 색으로 양교의 이미지도 구분되며 응원단도 사진처럼 적(赤)과 청(淸)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사진(D)엔 왼쪽이 전통의 붉은 색을 입은 고려대학교이고, 오른 쪽은 푸른색을 갖춰 입은 연세대학교의 응원단이다.
그밖에도 많은 스토리가 있으나 중요한 사건 위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벌어진 한국전쟁은 축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54년 전후(戰後) 첫 출전인 스위스 월드컵은 그야말로 고난 그 자체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일제가 우리의 땅에 들어 올 수 없다”는 엄명(嚴命)에 따라, 일본과의 경기는 어웨이(Away) 경기만으로 치르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대회의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여행사 실수로 모두가 함께 출발하지 못하고 개회식 다음날 경기가 있는 주전선수들이 먼저 가고, 나머지선수들은 2일이 지난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마저도 영국인 부부가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면 첫 경기는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기결과는 참담했지만 전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참가했던 것이었기에 스위스 국민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전쟁으로 지친 국민들의 희망이 되었다. 일제의 탄압과 전쟁을 거친 한국 축구는 전통적으로 기술 보다는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을 무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1956년과 1960년에 열린 제 1회·2회 아시안컵대회에서 2연패하며 짧은 시간에 아시아 맹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세계무대에서는 1983년 세계청소년대회에서 첫 4강을 달성했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대표팀이 4위를 차지했으며 여자는 20세 이하 선수들이 세계 3위를 달성하고, 17세 이하 선수들은 축구 역사상 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상의 자리에 섰다. 그리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숙적 일본을 이기며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아시안게임 우승(1960년) 세계청소년대회 4강(1983년) 월드컵 4강(2002년) U-17여자월드컵 우승(2010년)
이런 위업엔 앞서 언급한 연보전이나 경평전의 더비매치가 그 밑거름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100년 축구 역사 가운데 기술적 성장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했겠지만 정신력은 더욱 중요했음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우리는 축구를 통해 일 년에 딱 한 번, 일제의 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고,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 이것이 일본과의 축구전쟁에 임하는 자세였으며 불리한 신체조건과 열악한 저변 그리고 모자란 경기력과 경험을 극복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리 과장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우리 축구의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져 온 국민을 한 마음, 한 뜻으로 묶어주는 사회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해도 지나침은 없다.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한 축구는 한국사의 개회기에 태동하여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민족대통합을 이끌었고, 분단 이후에는 전후 폐허 속에서 국가를 재건(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함께 ‘박스컵대회’는 고도성장을 의미하는 아이콘이었다.)하는 상징으로 바쁜 국민들의 심신을 위로하는 한 축을 담당했으며 북한의 해상도발을 격퇴하며 월드컵 4강의 문턱을 넘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위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축구가 우리 민족에게는 단순한 운동경기의 의미를 뛰어 넘어 민족정서의 한 부분(이종영, 1997)이 되었으며 축구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열광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적으로 강렬한 민족주의를 상징(원영신, 2002)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축구의 민족 상징성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 사진 출처: 한국축구 100년사(대한축구협회,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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