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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둥지 기자단

“체스에 집중하고 싶어요.” -남녀 체스 선수 유가람, 배중기

 

 

글 / 김상호 (스포츠둥지 기자)

 

 

 

체스 선수를 만나다.

처음에는 체스 종목을 소개하는 기사를 쓰려고 했다. 체스 선수와의 이야기를 통해 체스의 매력을 꺼내 전하려고 했지만, 체스라는 종목은 생각보다 깊고 진지했다. 선수들과의 인터뷰는 박진감 넘치는 영화 같았고, 어느새 체스뿐만 아니라 체스 선수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아직 체스 선수를 만나본 일이 없다면, 꼭 한번 만날 기회가 있길 바란다. 아래 기록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체스를 정말 좋아하는 두 사람과의 대화다.


“뚜르르르, 안녕하세요? 유가람 선수. 김상호 기자입니다. 잘 지내셨죠?”
“네, 안녕하세요.”

“이번 실내대회 앞두고 체스 국가대표선수 한 명을 인터뷰 하려고 하는데 응해주시겠어요?”
“아, 아직 못들으셨구나. 저 이번 대회 안 나가요. 운영위원으로 일하게 됐어요.”

“네? 국가대표선발되신거 아니었나요?”
“선발되긴 했지만, 후배들한테 양보했죠”

 

대답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비인기 종목의 선수라면 국제대회에 입상하는 것을 더욱 욕심낼 것이라고 여겼었다. ‘스스로 출전을 양보하다니, 상심이 크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는 밝고 가벼웠다. 왠지 더욱 궁금해졌다.

 

“유 선수만 괜찮다면 예정대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저는 괜찮아요. 그럼 금요일 방과 후 활동 지도하는 곳으로 오시는 거죠?”
“네, 오후 1시에 학교로 찾아가겠습니다.”

 

‘마인드 스포츠를 즐기는 여성 스포츠인. 국제대회 경험을 쌓고 2013년 실내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다’라고 정해 놓은 주제는 이미 날아가 버린 듯했다. 우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또랑또랑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 하던 유가람 선수의 첫 인상을 떠올리니 출전을 포기한 데에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유 선수는 이미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국제대회를 겪어봤고, 국제 체스 올림피아드 대회에 여성팀 감독으로 출전 한 적도 있다. 단순히 경험을 많이 한 선수라서 후배들에게 양보한 걸까?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학교가 가까워오자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를 보니 출전 여부를 놓고 진지하게 물으려 하는 자신이 어색해졌다. 처음 만날 때도 이와 같았다. 인사를 나눈 후, “체스의 매력이 뭔가요?”라는 다소 식상한 질문을 하려 했지만, 이미 온몸과 표정으로 체스의 매력을 설명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었다.

 

2010 제16회 광저우 아시안 게임 여자체스 국가대표 유가람 선수

 

스포츠 신문에서 항상 접하는 ‘국가대표, 국제대회, 1위, 수상경력 등에 대한 욕심’은 오히려 기자인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휴, 이제 다 끝났네요. 그런데 오후 일정이 좀 달라졌는데 괜찮을까요? 오후에 있는 개인 교습은 동행취재가 어려울 것 같아요. 국가대표 선수들 ID카드 발급받으러 올림픽공원근처에 가야 해서요”
“네, 괜찮습니다. 함께 가면서 이야기 하시죠.”
“그리고 동행이 한 명 더 있어요. 이 학교 방과 후 체스 수업이 2개거든요. 다른 강사분은 배중기선수라고 이번에 실내대회 기술위원 맡으신 분이에요”
“아, 그런가요? 함께 인터뷰 가능할까요?”

 

 

바로 이 순간이었다. 갑자기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함께 집에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올림픽 공원이 있는 몽촌토성 역으로 가기 위해 두 사람과 함께 지하철을 타러 걸어갔다. 이동하는 내내 어색할 정도로 너무나 익숙한 기분의 출처를 파악하지 못해 한참을 고민했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런 대화가 오가면서 알게 된 건. 두 사람 모두 정말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질문이 끝나는 순간 즉각적이면서 명쾌한 답변이 들려오고 그 안에는 솔직한 사실만 담겨 있을 뿐, 호사스런 미사여구도 어색한 포장도 없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두 분 참 신기한 분이세요.”
“저희도 알아요.(웃음) 하지만 체스 선수 중에서는 참 평범한 편에 속한답니다.”
“유가람 선수정도면 정말 평범하죠. 다른 분들 만나보시면 정말 재밌으실 거예요.”

 

스스로를 신기하다고 표현하는 두 사람은 신기하지 않은 평범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배중기 선수는 전자공학과 석사 졸업 후 특허 관련 회사에서 근무 한 적이 있었으니 ‘신기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특징을 모두 알면서도 신기한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리라.

 

“쉽지 않았을 텐데 체스를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라는 질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사라졌다. 이 두 사람이 오래전에 지나간 질문일 테니까. 체스 선수만 하면서 지낼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체스 강사를 해야 하는 국내의 상황. 그렇기에 감내해야 할 또 다른 상황과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은 이미 자연스러웠다.

 

 

 

ID 카드 발급을 마치고, 함께 근처 커피숍에 들렀다. 문득,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질문보다는 미래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 체스선수로서 마지막 모습은 어떤 걸 생각하시나요?”
“저는 체스 대회에 초청 받는 모습을 항상 생각하죠. 여행하면서 체스를 두는 모습이 떠오르네요. 실제로 유럽투어와 체스 대회를 함께하기도 해요. 기차에서 체스대회를 열기도 하죠. 아마 그렇게 초청 받아 체스를 둘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는 게 바람이겠죠”
“저도 비슷해요. 그리고 저는 신혼여행도 체스대회랑 동시에 갔으면 좋겠어요. 낭만적이지 않나요? 이건 기사에 쓰시면 안돼요. 왠지 이런 말하면 남자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요”

 

두 사람의 목표는 현실적이고 소박했다. 인터뷰 내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이들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 대답을 듣고 나니 모든 짐을 내려놓고 대화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스를 두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로 신경전은 없는지 물었다. 배 선수는 체스 선수답게 체계적으로 정리된 역사적 사실과 체스 관련 정보를 들려줬고, 유 선수는 개인적인 경험을 더하며 이야기는 점점 흥미를 더해갔다.

 

국내의 체스 선수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 국내 체스 계를 짐작하게 했고, 15세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유디트 폴가의 이야기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블루투스이어폰을 이용해 치팅을 하다 적발된 인도의 체스 선수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발끈했고, 이어서 자비로 단복을 맞추고 항공료를 지급하며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한 유 선수의 이야기에서는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하지만 역시 깔깔대며 국제대회의 매력에 대해 말하는 두 사람 앞에서는 그저 가벼운 일화일 뿐이었다.

 

마치 고스트 바둑왕과 같았다. 만화는 바둑의 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신의 한 수를 둘러싼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두 사람 역시 체스의 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라는 체스의 끝에 도달하고 싶은 두 선수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나도 모르게 물었다.

 

“정말 확실한 스폰서를 만나서, 오로지 체스만 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으세요?”
대화 내내 막힘없이 대답하던 두 사람이 잠시 머뭇거렸다.
“IM(International master)까지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요. GM(Grand master)은 더 어렸을 때 체스를 시작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죠."

 

배 선수는 20대 중반, 유 선수는 고등학교 시절에 체스에 본격적인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선수는 그랜드마스터가 10대에 이미 완성된다고 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흑백의 판에 있는 말을 옮기는 이 보드게임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 결국 인터뷰 전 해결하려고 했던 질문은 해결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하지만 혹 떼러 갔다 혹 붙여 온 기분은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으니까. 그리고 약간의 힌트도 얻을 수 있었다. 체스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전쟁의 틀을 빌려 승패를 가르는 특징일 수도 있고, 자신을 단련하며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즐기게 만드는 게임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체스에서 실력을 쌓아나가려면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만들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어 있는 판에 자신의 전략을 승리로 이끌 움직임을 빈틈없이 채워 넣어야 하니까. 인터뷰 내내 느낀 건 두 사람 모두 그런 습관이 철저히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순수함은 모든 체스 선수의 특징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화 도중에 냉혹하고 야비하게 수를 계산하는 체스 선수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체스 1.5세대인 이들이 이토록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 왜 일까? 아무래도 체스 1세대를 만나야 그 궁금증이 해결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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