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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어느 한 운동선수의 삶과 그 의미(5)

 

 

 

글/ 김동현

 

            이 글은 “어느 한 운동선수의 삶과 그 의미”를 전제로 시작한 다섯 번째 이야기이다. 이 글에서는 운동선수로 살아온 그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무엇과 어떻게 관련되고 소통되는지 살펴보고자 하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된다.

 

삼포세대에 버금가는 삼(삶)포 학생
요즘 사회에서는 ‘삼포(三抛)세대’라는 웃지 못 할 신조어가 회자되고 있다.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집값 상승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급기야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삼포세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조어를 접하게 되면서 나는 엘리트체육의 기반인 삼포(三抛)학생들을 떠올려 본다.


삼포세대와 동시대를 살아가며, 삼포세대에 버금가는 삶을 살아가는 이른바, 이 시대에 새로운 삼포세대인 것이다. 삼포세대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면 학생선수들은 학습권, 인권, 신체를 포기한 이 시대에 진정한 삼포세대이다.


나 역시도 운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이 학업이다. 삼포세대들이 연애를 포기하듯이, 나는 운동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업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나에게 인권은 사치에 불과했다. 당시에, 인권이라는 것은 운동을 더욱 잘하기 위해서 운동장, 체육관, 그리고 기숙사에 반납한 채 운동만 했다.


이와 함께, 지도자들의 매질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지도자들의 매질이 끝나면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나는 또 다시 운동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에게 인권은 무엇이었을까?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지도자들의 관심이었다. 운동을 더 잘할 수 있게 담금질을 해주는 지도자들의 관심이 나에게는 최고의 인권이었다. 그것이 내가 운동을 잘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포세대들이 취업이라는 것에 목을 매달고 결혼을 포기하듯이, 나 역시도 운동을 위해, 경기실적을 위해, 그리고 상급학교진학을 위해 신체의 소중함마저도 포기했었다. 중학교시절부터 나이에 맞지 않는 운동을 해오면서 온몸은 멍투성이가 되었고, 거의 매일을 골골거리면서 잠이 들었다. 아프다고 말을 하고 쉴 수도 있었지만, 나는 두려웠다. 하루 쉰다는 것이 큰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꾀병이라는 오해를 사지 않을까, 혹시나 경쟁구도에서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나는 서있지 못할 정도가 아니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합출전의 유리함을 차지하기 위해 체중도 자유자재로 불렸다 빼다를 반복하면서 신체의 소중함을 서서히 잊어갔다.


이렇듯,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학습권, 인권, 신체를 포기하고 운동에만 매진한 삶을 살아온 우리는 운동을 그만두고 나면 마지막으로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인생의 반을 운동만 하고, 배운 것이 운동뿐이며, 할 줄 아는 것이 운동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사회생활의 적응은 극히 어렵다. 운동을 일찍 그만둔 학생선수들은 오히려 다행이지만, 운동을 오랜 기간 할수록 삼포학생에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으로까지 나가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운동선수들의 삶을 이와 같이 극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삼(삶)포 학생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같은 삶을 살아온 나에게도 인정하기 싫은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기에도 더욱 난해한 현실이기에 나는 운동선수로서 삶의 의미를 삼포학생이라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겉은 엘리트(elite)·속은 마이너리티(minority)
엘리트체육의 기반이 학교운동부라는 사실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학생선수로서의 삶은 ‘엘리트’라고 말하기에는 어쭙잖은 것이었다.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마이너리티’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육체적·문화적 특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불평등하게 대우를 받아서 차별의 대상이 되는 소수집단인 마이너리티가 나, 그리고 학생선수들에게는 적절한 듯하다. 육체적으로는 지나치게 뛰어나고, 문화적으로는 완전히 고립되어 다른 일반학생들과는 구별되고 다른 대우를 받아온 그런 존재가 바로 학생선수이고, 나아가 운동선수들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선수라면 멋있어 보이고 튼튼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은 아마도 그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운동선수는 단순무식, 폭력, 단세포, 운동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99%의 다수인 그들이 1%의 운동선수들을 생각하는 것이 극히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운동선수들이 이기는 것을 보고 열광하다가도, 그들이 실수라도 한번하면 끝없는 질타를 쏟아 내기에 바쁘며, 심지어 입에 담기 힘든 욕을 내뱉기도 한다.
 
일반사람들은 나에게 “혹시.......운동하셨어요?”라고 묻고 “네”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들리지 않게 “아~~~”라고 대답한다. 이 순간이 바로 그들이 운동선수인 우리와 운동선수가 아닌 그들의 사이에 차별의 선을 긋는 시점이다. 그리고 언제부터 운동을 했고, 언제까지 운동선수생활을 했느냐에 따라서 평가하기도 하는데, 운동을 빨리 시작하고 늦게까지 했을수록 그들은 우리와의 사이에 더욱 굵은 선을 긋고,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로 규정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차별 아닌 차별의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그들의 반응은 운동을 그만 둔 나의 일상생활에서도 계속됐다. 내가 뭐 하나라도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하는 말은 다 똑같다.


“너는 다른 운동선수출신들이랑 다르네!” 그리고 한 가지 실수라도 할 때면, “운동선수출신인거 티 내냐!”라는 말을 한다. 인종차별, 성차별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데에 차별의 선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보다 문제는 나, 그리고 우리에게 있다. 우리, 즉 운동선수들은 차별됨에 따라 저항하기 보다는 순응하고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급학교진학이라는 근시안적 목표에 따라 스스로 학업을 포기하였고, 그들과는 차별되는 특혜를 누리는 것에 도취되어 스스로 차별의 선을 그은 것이다. 이렇듯 운동선수로서 나의 삶은 엘리트라고 하기에는 약간은 어설펐고, 마이너리티로 표현하기에 보다 적절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차안대(遮眼帶)를 하고 달려온 10년
운동선수로서 앞뒤 가리지 않고 운동만을 위해 달려온 10년이라는 기간은 마치 차안대를 하고 달리는 말과도 같았다. 물체의 식별이 분명하게 되지 않는 말의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사용되고, 뒤나 옆에서 다른 말이 따라 붙더라도 보이지 않게 하여 불안감 없이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효과가 있는 차안대가 운동선수로서 나의 삶에도 있었으며, 말이 나타내는 공포심이나 불안감의 정도에 따라 차안대의 크기를 조절하듯이 나에게 차안대도 시기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운동선수로서의 삶에 있어서 나에게 차안대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에 대한 식별능력이 부족하던 학생선수시절 내가 운동외적인 것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게 나의 시야를 차단시킨 것은 무엇일까? 말이 나타내는 불안감에 따라 차안대의 크기를 달리 하듯이, 나의 불안감이 커짐에 따라 달라지는 차안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나의 삶에 아주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변명에 그칠 수도 있지만, 내가 운동부에 들어가서 왜 공부를 하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왜 학업을 전폐하고 학교생활을 해왔는가의 문제와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지며, 나에게 차안대는 시기마다 다른 형태로 씌워졌다.


중·고등학교시절 나에게 차안대는 대부분의 연구에서 주장하듯이 체육특기자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고자 하는 신념을 가지고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체육특기자제도는 이러한 나의 신념을 백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운동이외에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이 제도는 공부와 나를 갈라놓았다. 딱히 내놓을만한 경기실적이 없는 상태에서 공부를 하고 수업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시험전날 공부를 하지 않고 노는 것과 같이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학교의 재정적 지원까지 받고 있는 상태라 더욱이 운동이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학생선수로서 일탈행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나를 배려라도 해주듯이 대학을 가기위한 관문 중의 하나인 수학능력시험에서는 60점만 넘으면 내가 가고자하는 대학도 문제없이 갈 수 있었다. 60점이라는 기준이 나에게 벅찬 것일 수도 있었지만, 400점 만점인 시험에서 60점 이하로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대학에 진학한 나는 새로운 차안대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수업과 전혀 상관없이 주어지는 학점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공부를 해야지!”라는 마음을 먹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다시 공부를 포기했다. 내가 다닌 학교만 유독 그랬던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운동과는 관계없이 학점이 나왔다. '구조기능주의', '갈등주의'가 뭔지 몰라도 스포츠사회학 과목의 학점은 어느 정도 나왔고, 체육과 스포츠의 역사를 몰라도 체육사 과목의 학점은 그리 낮지 않았으며, ATP가 뭔지 몰라도 운동생리학 과목의 학점은 졸업하기엔 하등의 지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선택은 단연 운동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학업과 멀어졌고, 나의 학창시절 전부를 운동에만 몰두했으며, 그 대가로 실업팀에 가게 되는 혜택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내가 달려온 10년은 마치 말에게 차안대를 하고 달리게 한 것과 같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체육특기자제도라는 차안대를 씌었고, 대학진학 후에는 학력의 검증 없이 학점을 부여 받게 되면서 나는 학업부진이라는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였으며, 운동이라는 단일목적을 향해 경주할 수 있었다.

 

 

 

◆ 이 글은 <김동현(2012). 나에게 운동은 무엇이었나?: 운동선수로서의 삶과 그 의미에 관한 내러티브 탐구. 체육과학연구, 23(2), 343-359.>의 내용을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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