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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둥지 기자단

‘유도 천재’ 전기영의 ‘자존심을 건 한판 업어치기 도전’

 

 

 

글 / 이철원 (스포츠둥지 기자)

 

 

              1990년대 세계 유도의 정점에 섰던 남자, 싱가폴 유도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전기영(39. 용인대)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기영, 전 세계 유도계에서 아직까지도 ‘업어치기의 교본’이자 ‘한판승의 사나이’로 불리고 있는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못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세계선수권대회 3연패(두 체급 석권)와 199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 그리고 용인대학교 유도경기지도학과 사상 처음으로 비용인대 출신으로써의 교수임용까지.

 

1년간의 교환교수 형식으로 싱가폴에서 유도 대표팀을 지도하고 있는 전기영과 두 시간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봤다.

 

 

전기영 Ⓒ 이철원

 

 

▶ 싱가폴에서 뵙게 되서 더 반갑습니다. 우선, 싱가폴 생활은 만족스러우신가요?
싱가폴에 온지 벌써 반년이 넘었네요. 참 살기 좋은 곳인 것 같습니다. 큰 불편함 없이 낮에는 영어 과외를 받고 저녁에는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중국어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영어 하나만으로도 벅차서 아직 중국어는 시도를 못하고 있습니다.

 

▶ 이곳 선수들을 지도해보니 어떻습니까?
우선,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배운 선수가 없다보니 기본기가 약합니다. 그리고 동남아 선수들의 타고난 신체적 열세와 부족한 운동시간 등이 많이 아쉽습니다. 선수들이 열심히 따라주고는 있습니다만 훈련시간을 늘릴 수 없는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훈련해서 어떻게 국제무대에서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 그래도 최근에는 성과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베트남 오픈대회에 참가해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지난 10년간 이곳 유도 대표팀이 국제시합에 나가서 금메달을 딴 적이 없었기에 이곳 관계자들이 상당히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시안게임 같이 큰 대회에서 경쟁력을 가지기에는 부족합니다. 처음에 선수들을 데리고 국제대회에 참가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경기 중에 영어로 코치를 해야 하는 것이 부담 되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한판 패를 당해버리더군요. 정말 ‘딱지치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웃음).

 

▶ 챔피언 출신으로써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시합장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선수들이 큰 시합만 나갔다하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지니까요. 사실, 처음에 싱가폴 측 제의를 받았을 때 계약기간만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교환교수도 일 년까지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휴직계를 이용해서라도 일 년 정도 더 지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지금 이 상황은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다가오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과 그 이후의 올림픽에서 ‘전기영’에게 배운 실력을 뽐내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휴직을 하면 경제적으로도 많은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싱가폴 측에서 합당한 대우를 약속한다면 일 년 정도 시간을 더 투자해보고 싶습니다.

 

▶ 싱가폴 유도의 전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스케이트 대표팀을 가르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싱가폴에서 유도는 비인기 종목입니다. 탁구나 수영 같은 인기 종목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도 연습장에 에어컨조차 없는 현실은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도만 하는데도 땀이 너무 많이 흘러서 4KG이 빠지더군요(웃음). 또한, 이곳 선수들의 신체적 조건이 좋진 않기 때문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키고 싶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곳 선수들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싱가폴 체육회에 있는 체육관을 쓰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사용승인을 해주지 않더군요. 분명 몇몇 종목의 선수들은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또한, 남자선수들의 군복무는 정말 대책이 필요합니다. 2년간의 공백기도 문제지만 시합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지도하는 선수 중 그나마 가장 소질이 있어 보이는 친구에게 훈련 시간을 더 늘릴 수는 없냐고 물어봤더니 군인이기 때문에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럼 국제대회에라도 자주 참가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허가를 안 해주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곳 사정상 훈련을 일주일에 3~4번 정도 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선수들이 불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 교육부의 지침 상 선수들이 수업과 시험을 끝낸 후에만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정책과 교육에 대한 개혁이 절실해 보입니다.

 

▶ 스포츠정책과 학생선수의 교육정책은 균형을 맞추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후배(필자)도 선수생활을 해봤으니 알겁니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또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 투자가 필요한지 말입니다. 물론, 이곳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아...학생 때 수업에 자주 참여했으면 지금 이렇게 고생하진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때 수업에 매일같이 참여를 했더라면 올림픽 금메달은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교수의 입장으로써도 ‘선수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하는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한국은 선수들에게 공부를 조금 더 시킬 필요가 있어 보이고, 싱가폴은 공부를 조금 줄일 필요가 있어 보이는 참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 문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끊임없이 머리를 맞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은퇴 후 체육과학연구원과 공동연구를 하신 걸로 알고있습니다
2000년대 초 김영수 박사님이 진행하신 ‘탈란투라’라는 프로젝트였는데 전 세계의 유도 강자들의 영상을 다 모아서 자료화시키는 작업이었습니다. 각 선수의 특기와 사용하는 기술 등 유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세분화시킨 후 키워드만 입력하면 유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영상으로 검색해서 볼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선수들의 영상을 쉽게 검색해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해외 강자들과 자주 맞붙어본 선수들은 상대편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 실제 영상을 보며 기술을 하나하나 다시 파악하는 것은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아주 작은 차이가 결과에서 큰 차이를 가져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스포츠 과학입니다. 처음에는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에 일선의 지도자들이 이런 연구를 많이 불편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훈련하기도 바쁜데 선수들을 불러서 테스트를 진행하고 피를 뽑는 등 번거로운 일이 많아지니 짜증이 나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겪지 않으면 절대 장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2004년 아테네 대회부터 지난 런던 올림픽까지 유도 대표팀이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데는 분명 체육과학연구원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영어 공부에 많이 집중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퇴 후 일본에서 1년 정도 머물며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경력 때문인지 한국에 돌아오니 일본 측에서 손님만 왔다하면 저를 부르더군요. 운동만 하던 사람이 고작 1년 공부해서 어떻게 통역을 하겠습니까? 정말 진땀 흘릴 일이 많았습니다(웃음). 그때가 자꾸 생각나서 영어 공부에 더 몰두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유도 관련 업무로 한국에 방문하는 손님들이 있으면 그들과 통역 없이 의사소통을 하는게 제 목표입니다. 계약연장을 생각하는 최우선적인 이유는 선수를 육성하는 것이지만 할 수 있을 때 영어를 더 배워보고 싶은 욕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곳에 와서 선수들을 지도하다 보니 처음 계약과 다른 상황들에 부딪히게 되더군요. 제가 영어를 좀 더 구사할 수 있었더라면 시작단계부터 계약조건을 꼼꼼히 살폈을 것이고, 지금 상황에서도 더욱 능숙하게 어필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늦은 나이에 영어문법부터 다시 시작하는게 쉽지는 않습니다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목표를 정했으면 꼭 이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배움, 그 자체의 재미가 쏠쏠합니다. 제가 싱가폴 생활에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아내가 “당신 요즘 영어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말해줄 때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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