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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런던 올림픽을 통해서 본 진지함과  여유로움

 

 

글/ 이성호 (한양대학교 영문학 명예교수)

 

 

      “꽁뜨르 아따끄 (역공)와 꽁뜨르 빠라드 (막고 찌르기)를 번갈아 썼다. 잠시라도 멈춰 있으면 다리가 떨릴 것 같아 부지런히 삐스뜨 (경기대)를 뛰었다. 그러다보니 끝났다. 금메달이었다.”


이는 2012 런던 올림픽 펜싱 사브르 여자 단식 결승 경기를 막 끝낸 금메달리스트 김지연 선수의 우승소감이다.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은 아름답다. 물론 유럽 검투를 모델로 삼은 펜싱 경기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꽁뜨르니 아따끄니 삐스뜨니 하는 용어는 낯선 프랑스 말이다. 그러나 김 선수가 우주복 같은 운동복을 얼굴부터 내려쓰고 앞뒤로 내다르며 칼끝을 내찌르는 몸놀림은 날렵했다. 경기 용어를 잘 몰라도 좋다. 그저 그 날렵한 몸짓으로 뛰어다니는 진실함을 볼 수 있었기에 좋았다. 이런 진실한 모습은 우리에게 깊숙한 충격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김지연 선수는 시상식이 끝난 뒤 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깜짝 금메달’이라고 한다. 사실 내가 더 깜짝 놀랐다. 내가 미쳤나보다.”

 

ⓒ대한체육회

 

“내가 미쳤나보다.” 바이론 연상케 한 김지연 선수의 여유
잘 알려진 일화지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론(Lord Byron)은 지중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긴 서사시 <차일드 해롤드의 유랑>를 완성했다. 그 다음날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내가 유명해져 있었다.(I woke one morning to find myself famous.)” 


앞서 김 선수가 자기 심경을 토로한 이야기는 바이론의 이 설명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일 경기 내내 유지했던 진지함의 연장선상에서 “코치에게 감사하고 부모님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틀에 박힌 말을 했다면 이 얼마나 썰렁했을까. 그는 이제 “열심히”라는 말로 요약되는 진지함을 끝내고 “사실 내가 더 놀랐다.”라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다부진 결심으로 경기하는 진지한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여기에 여유로움으로 이어지는 차분한 모습은 더욱 아름답다.  


대회 초반 경기를 치른 신아람 펜싱 선수의 경우는 다르다. 신아람 선수는 오심으로 패배했다. 연장전 1초를 남겨두고 스코어는 5-5. 이대로 끝나면 우선권을 쥔 신 선수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 선수의 네 번째 공격이 성공할 때까지 시간은 가지 않고 1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실의에 찬 신 선수는 1시간 동안 삐스뜨에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는 게임에서 졌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다. 유럽 경기인 펜싱에 도전하는 신흥 한국의 선전을 견제하려는 냉엄한 국제 스포츠 현실을 질타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공정을 내세우는 거창한 올림픽 정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최선을 다하겠다는 진지함이 외부요건에 의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다. 틀림없이 진지함의 완성을 이룰 수 없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눈물은 스포츠 경기의 진지함을 완성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어필이다. 그는 그 후 단체 경기에서 은메달을 따고 엷은 웃음을 보였지만 진정한 여유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뛰어난 유머 감각
속 깊은 선수들은 경기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온 힘을 다 할뿐이다. 이런 선수들도 경기에서 지고나면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이 눈물은 그러나 ‘속 좁음의 들통 나기’가 아니다. 오히려 진지함의 뒤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곧 눈물을 거두고 잔잔한 미소를 보일 수 있다. 그 미소는 여유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나는 이런 미소를 보면 세상이 확 트이는 환희를 느낀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았다. 수영에서 역도에서 높이뛰기에서 실점을 하고나서 눈물을 떨어뜨리다가도 곧 마음을 보듬는 웃음을 보였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듣는 기분이다.


진지하게 살면서도 유머를 통해 여유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은 뛰어난 유머감각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국회 등원 길에 계단에서 넘어졌다. 이를 본 의원들이 깔깔대며 웃어대자 그는 “그렇게 즐거우시면 한 번 더 넘어지겠습니다.”라고 농담을 건넸다.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그의 정치적 진지함에다 여유로운 유머감각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그는 고인이 된 뒤 아직까지도 인기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Shaw George Bernard) 의 비문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우리말 번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래 살다보면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내 진작 알고 있었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정도로 번역하면 족할 것 같은데, ‘우물쭈물’이라는 말이 끼어들어 더 유머러스하게 되었다. 많은 업적을 남기며 진지하게 살다가도 죽음에 대해서까지 여유를 보이는 유머다.

 


산다는 것은 운동경기 하듯 열심히 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걷다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둘러보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운동선수가 미소를 짓듯, 죽음이라는 끝자락이 보이더라도 ‘우물쭈물하다가 여기까지 왔구나!’하며 미소를 짓는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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