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하는 우리에게 낯익은 표현이 한 가지 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라는 표어다. 천 육백년 만에 다시 시작된 근대 올림픽의 모토로 사용된 유명한 문구다. 인간이 지닌 스포츠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노력을 짧고 강하게 표현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구호다. 상대를 이기고 자신을 극복하도록 최고조의 기량을 폭발시키라는 주문이다. 이 말의 로마어 표기는 <Citius, Altius, Fortius>다. CAF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고급 스포츠브랜드의 명칭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 문구는 <스포츠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라는 쿠베르텡의 유명한 연설 구문과 함께, 스포츠의 진정한 정신을 드러내어 알려주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사랑받고 있다. 더욱 더 빨리 달리고, 더욱 더 높이 뛰어오르고, 더욱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스포츠의 수월성을 높이고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상대와의 멋진 경쟁을 통해서 각자가 지닌 탁월성을 최고조로 높이고 자신을 더욱 더 개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스포츠가 지향하는 바가 경기력 향상에만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는 다른 방향으로도 마음을 둔다. 그리고 그 방향은, 겉으로만 본다면, 경기력 향상과는 정반대쪽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스포츠는 “운동안 심화”라는 방향을 지향하기도 한다. 스포츠는 시합에서 이기는 것으로만 그 본래적 목적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는 경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실행하게 되느냐의 차원도 얻고자 한다. 얼마나 잘 하느냐만이 아니라, 어떻게 잘 하느냐도 눈여겨본다. 스포츠는 멋진 플레이, 아름다운 경기, 올바른 대적 등과 같은 진선미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포츠의 최초 중흥기였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추구되었던 한 가지 체육의 이상은, 아주 멋진 발음을 지닌, “아레테”(arete)라는 가치였다. 아레테란 어떤 활동이던지 그것의 기술적 최고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내는 사람의 인격적 덕스러움을 함께 의미한다. 그리하여 아레테란 한 사람이 지닌 기능적 차원과 심성적 차원의 최고 상태를 동시에 갖춘 이상적인 가치로서 추구되었다. 아레테는 스포츠의 장면만이 아니라, 교육, 정치, 경제, 의료, 군사 등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가치 가운데 하나로서 추앙되었다.
스포츠의 장면에서 아레테는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멋있게 올바로 실행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우승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우승이 정정당당히 얻어지는 것을 뜻한다. 가장 많은 득점을 해서 최고의 골게터가 되어야 하되, 멋지고 당당하게 득점을 얻어내는 것을 말한다. 우승하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지닌 최상의 기량의 펼치고 최선을 다 한 것에 스스로 만족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스포츠기량과 스포츠맨십이 하나가 된 플레이를 펼쳐내는 것을 이야기한다.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스포츠 아레테는 기와 도의 통합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기능적 방향으로 내치닫는 스포츠를 “르까프 스포츠”(Le CAF sport)라고 부른 적이 있다. 르카프 스포츠는 기술적으로 더 잘 하는 것을 추구하는 스포츠다. 상대를 누르고 승리와 우승을 쟁취하기 위한 경기능력 증진으로 모든 것을 가늠하는 스포츠를 말한다. 골을 더 많이 넣고, 더 큰 홈런을 때리고, 더 높이 뛰어 오르는 스포츠를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르까프 스포츠를 “다대고 스포츠”(多大高 스포츠)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이>를 부르짓는 스포츠다. 표현이 약간 달라서 그렇지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를 외치는 올림픽 모토와 한 가족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기량과 심성의 합일을 추구하면서 아레테를 지향하는 스포츠를 “아레테 스포츠”(Arete sport)라고 부른다. 아레테 스포츠는 기술적 차원과 심성적 차원이 하나가 되는 것을 희망한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멋있게 시합하는 것을 가치롭게 여긴다. 관중에게 맹렬히 추앙받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 편은 물론 상대편도 함께 승리하기를 기대한다. 스포츠가 좀 더 참되고, 좀 더 선하고, 좀 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도록 바란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아레테 스포츠를 “진선미 스포츠”(眞善美 스포츠)라고 일컫기도 한다.
다대고 스포츠와 진선미 스포츠는 수퍼마켓에서 파는 두 개의 물건처럼 서로 다른 진열대에 놓여 있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이 둘은 하나의 물건이다. 하나의 물건을 부르는 두 가지 명칭이다. 이 둘은 하나의 실재이다. 하나의 실재가 드러내는 두 가지 상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농구가 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는 가에 따라서 나에게는 다대고 농구와 진선미 농구가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농구를 실천하는 가에 따라서 나는 르까프 농구를 하던가 아레테 농구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농구를 구분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의 수준과 방식이다. 르까프 스포츠와 아레테 스포츠는 한 가지 스포츠의 두 측면을 부르는 이름들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스포츠를 배울 때 우리는 르까프적 차원과 아레테적 차원을 동시에 배울 수 있다. 내 개인적 체험으로는 전자에 초점을 맞춰서 배운 적이 훨씬 더 많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며 앞으로도 그다지 바뀔 것 같지는 않은 상황이다. 욕구충족과 승리쟁취가 일상생활의 일차 기준인 현실 세계에서는 다대고와 르까프가 발등의 불이고, 진선미와 아레테는 강 건너 불에 불과할 뿐이다. 전자는 시급한 진화의 대상이고 후자는 느긋한 구경의 대상일 뿐이다. 일상의 스포츠에 있어서 대다수의 지향은 르까프 방향으로 쏠려있기 마련이다. 이겨야 기쁘고 얻어지는 것이 있고 뿌듯하지, 지게 되면 많은 것이 부정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현실이 그렇기는 해도, 다대고 스포츠가 기쁨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르까프의 방향으로 돌진한 한국 스포츠가 보여주는 양면성을 한 번 보라. 올림픽에서의 상위성적, 피겨와 골프에서 세계적 스타선수의 등장, 국제대회의 유치 등등 참으로 대단한 성취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와 함께 끊이지 않고 드러나는 감독의 선수(성)폭행, 선수의 승부조작, 심판의 편파판정, 임원의 비리월권 등등 참으로 대단한 창피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진선미와 아레테의 정신이 스포츠 세계의 전 영역에서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기는 것과 최고가 되는 것만이 대세인 한국 스포츠계는 아레테와 진선미의 가치를 높이 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대고가 승하면 진선미가 패하고 르까프가 진하면 아레테가 퇴하게 되는 것이 세상지사다.
공인된 스포츠 강국에 이미 진입한 우리에게는 이제 그동안 소홀히 해왔던 스포츠의 소중한 가치를 되돌아보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기는 것, 잘 하는 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되찾아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 가치는 바로 아레테요 진선미다. 한국 스포츠는 이제 아레테 스포츠를 지향하고 진선미 스포츠를 추구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있다. 금메달과 우숭컵의 찬란함에 넋놓고 혼뺏기기를 멈추고, 스포츠맨십과 스포츠문화와 스포츠정신을 고양시키고 향상시키는 일에 기운을 쏟는 일을 시작해야 하는 때이다. 이것이 우리가 스포츠 강국의 지위에 머물지 않고, 스포츠 부국, 스포츠 선진국의 품위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은 어디에 있나? 어떻게 그 길을 찾아 나서는가? 나는 그 길이 교육에 있다고 확신한다. 아레테 스포츠를 지향하는 스포츠 부국으로의 길은 바로 스포츠 교육의 힘으로 닦아야 한다. “스포츠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코칭)을 제대로 잘 해내는 것이야 말로 르까프 스포츠 나라에서 진선미 스포츠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첩경인 것이다. 스포츠 게임강국에서 스포츠 문화부국으로 성숙할 수 있는 정도인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에게, 노인들에게, 선수들에게, 감독들에게, 정치인들에게, 행정가들에게, 어머니들에게, 아버지들에게 스포츠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포츠선진국의 국민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고대 이래로 진선미의 가치는 교육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학습되었다. 다대고의 가치는 본능의 강화로 적절히 충족될 수 있다. 하지만, 참됨과 올바름과 아름다움의 가치는 의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적 조처 없이는 사람에게 갖추어지지 않는다.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늑대소년은 교육을 통해서야 인간소년으로 다시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네 발로 있다가 두 발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온전한 인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진선미의 가치들이다. 다대고와 르까프만을 강조하면 우리 앞에 등장하는 인물은 살벌한 스포츠 정글에서 자라나 생존본능으로 가득한 맹수의 눈을 가진 스포츠 늑대소년과 소녀들일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참다운 운동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아레테 스포츠 교육인 것이다.
아레테 스포츠 교육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단적으로 말하여, 그것은 인문적 방식으로 한다. 인문적으로 스포츠 교육하기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스포츠를 가르치고 배울 때, 인문적 지혜와 서사적 체험을 동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문적 지혜와 서사적 체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스포츠를 내용으로 하는 스포츠 문학, 스포츠 예술, 스포츠 종교, 스포츠 역사, 스포츠 철학적 지혜와 체험들을 함께 맛보는 것이다. 야구 게임을 배우면서 야구시, 야구소설, 야구자서전, 야구에세이, 야구회화, 야구음악, 야구조각 작품들을 음미하고 감상한다. 야구와 기독교, 야구와 불교, 야구와 신앙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면서 깨달음의 체험을 추구한다. 야구 시합을 하면서 듣기와 보기와 읽기와 그리기와 생각하기와 느끼기 등 전신체적 정서반응을 도모한다. 스포츠의 인문적 체험과 인문적 지혜의 스포츠적 활용을 통해서 스포츠를 배우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에 참됨과 올바름과 아름다움을 심어줄 수 있게 된다.
르까프 스포츠와 아레테 스포츠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하나의 동전이 지니고 있는 두 측면이다. 그동안 앞면만 주시했다면, 이제는 뒷면도 보아야 할 때다. 화폐가 액면가만큼 가치로우려면 양면이 다 제 형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스포츠로 국격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진선미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이다. 우리에겐 그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안목이 필요하다. 나는 그 안목을 “운동안”이라고 부르며, 그 시력을 밝게 만드는 것이 바로 스포츠의 진선미적 차원을 더욱 깊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스포츠를 <더 참되게, 더 올바르게, 더 아름답게 하는 일> 즉 운동안을 심화시키는 일은 인문적 스포츠교육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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