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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폴더/스포츠미디어

미디어가 만든 한 시대의 "아이콘" 조 프레이저

 



                                                                             글/김학수(한체대 스포츠언론정보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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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내 주요 신문과 방송들은 한 위대한 프로복서의 죽음을 전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복서 조 프레이저가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전날 갑작스레 미국 AP 통신 등을 통해 간암으로 위독하다는 기사가 타전된 데 이어 하루만에 부음기사가 전 세계로 전해졌다. 한때 적수였던 무하마드 알리의 쾌유 응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려했던 복싱인생을 접고 맨 주먹으로 이승으로 떠났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세계적으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국내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프레이저 인물정보란에 국화꽃을 조화로 장식하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머리글을 띄우며 자세한 신상명세를 올렸다. 비록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세계 프로복싱계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던 그의 죽음의 무게를 감안했을 법하다. 네이버에서 매번 세계에 특별한 영향을 남긴 사람들이 죽으면 이러한 애도의 표현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참 인상적으로 보였다.

프레이저의 죽음이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은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최고의 선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TV가 낳은 한 시대의 위대한 아이콘이었다. 나를 비롯한 50대 이상의 올드 복싱팬들에게 프레이저는 추억의 복서였으며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는 미디어가 어떻게 그를 아이콘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대상이 될 법한 인물이었다.

지금은 국내서도 별 인기가 없는 사양종목이 됐지만 프레이저가 한창 선수로 활약할 때만해도 프로복싱은 최고 인기 종목이었다. 미국도 그랬고 국내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풍미했던 프레이저는 무하마드 알리와의 세계적 라이벌전으로 세계프로 복싱팬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닐라의 대회전을 포함한 알리와의 세기적인 라이벌전은 세계프로복싱사에 가장 위대한 일전으로 기록됐다.

프레이저에 대한 내 추억은 까까머리 중고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15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어진 프레이저와 알리의 첫 경기는 TV를 통해 국내에 생중계됐다.중학교 1학년때 오전 수업시간중에 벌어진 이 경기는 나를 비롯한 학생들과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 모두의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워낙 프로복싱이 인기가 있었던데다 당대 최고의 헤비급 복서가 격돌했으니 학생, 선생님 모두가 당연히 열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교무실에 TV가 딱 한 대 설치돼 있었는데 수업 후 잠시동안의 휴식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교무실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교무실 유리창 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시청해야했다.

15라운드에서 스모킹’(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라는 의미)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프레이저는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화끈한 복싱으로 알리에게 15회에 한 차례 다운을 뺏은 끝에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프레이저의 경기를 처음으로 본 이후 나는 프로복싱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 전까지만해도 프로복싱을 유난히 좋아했던 사촌 매형이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지는 동양타이틀전이나 세계 타이틀 전 등에 열광하는 이유를 잘 몰랐으나 프레이저의 파이팅 넘친 경기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프로복싱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이다.

이후 프레이저와 알리의 라이벌전은 두 번 더 벌어졌다. 1974년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12라운드 논타이틀전과 1975년 마닐라 세계타이틀 매치 대회전이었다. 아마도 프레이저의 두 번째 경기는 TV로 본 기억이 없고 신문 기사를 통해 알리가 판정승을 거두었다는 내용을 알게 됐고 마지막 세 번째 경기는 TV로 시청을 했던 것 같다. 15라운드에 프레이저의 한쪽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부어 오르자 트레이너가 수건을 던져 경기를 포기했던 이 타이틀전을 끝으로 프레이저는 쓸쓸하게 은퇴를 길을 걷게됐다.


알리와의 타이틀전이외에 프레이저의 경기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쇠주먹조지 포먼과의 타이틀전이었다. 1973년 중학교 3학년때였다. 집에 TV가 없기 때문에 동네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는 조건으로 이 경기를 시청했다. 당시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힘들던 시절이라 서울시내에 TV를 갖고 있는 집이 열 집에 한 집 정도도 되지 않을 때였던만큼 만화방이나 다방 등은 주요 스포츠 경기가 열릴 때면 TV를 미끼로 손님을 끌어 들였다.

경기 시작전 강력한 눈매를 주고 받으며 기싸움을 했던 이 경기는 프레이저가 2라운드 동안 6번이나 다운을 당하며 KO패로 무릎을 꿇었다. 엄청난 포먼의 주먹 앞에 프레이저는 독안에 든 생쥐같은 신세였다. 이렇다할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강력했던 그가 허접하게 무너졌던 것이었다.

지금도 프레이저의 경기만큼 극적이고 스토리가 풍부한 것은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마이크 타이슨, 슈거 레이 레너드 등 강력하고 뛰어난 복서도 많이 나왔지만 프레이저는 알리와 포먼 등과 같은 시대에 많은 화제를 뿌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이들은 프레이저에 대한 추억은 매스 미디어와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다.
프레이저의 경기를 직접 경기장에서 보거나 만난 사람은 미국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워낙 입장권이 비싼데다가 경기장이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복싱팬들은 프레이저의 선수로서의 삶과 죽음을 철저히 매스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컨텐츠를 통해 알 수 밖에 없었다.

프레이저는 대중매체에 어떻게 비쳐졌을까. 몸을 수그리고 거침없이 날리는 공격, 상대를 코너로 몰아넣고 머리를 낮추고 쉴새없이 잭을 날리다 기회가 엿보이면 강력한 왼쪽 훅을 터뜨리는 탱크형의 경기 스타일은 프레이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러한 프레이저의 모습은 TV를 통해 더욱 정형화됐으며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졌다. 특히 알리와의 라이벌전에서 만들어진 프레이저의 이미지는 철저히 미디어에 의해 연출된 것이었다.나비같이 날아, 벌처럼 쏜다는 어록으로 유명했던 알리는 키 크고 잘생겼으며 시적인 영감이 있고 매력있고 알랑거리다가도 상대를 헐뜯으며 월남전에 반대하고 흑인들을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등 인텔리형 복서로 장식된데 반해 프레이저는 블루칼라 이미지로 몇 마디 말만 내뱉는 소같은 사람, 단지 링에서나마 알리의 상대로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험상궃은 사나이로 표현됐다. 둘 간의 대조적인 모습은 미디어에 의해 더욱 확장돼 복싱팬에 의해 각인됐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이분법으로 프레이저와 알리를 일반화시켜도 되는 가에 대해 강한 의문이 생겼다.
사실 프레이저는 알리의 카리스마나 떠벌이 기질과는 전혀 매치를 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프레이저는 끊임없이 스타르타식 훈련에 몰두하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복싱을 하며 링위에서 모든 열정을 다 받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복싱만을 갈구하며 사랑한 진정한 경기인이었다.

프레이저는 알리는 항상 내가 없었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내가 없었다면 알리의 모습도 달라지지 않았을까?”라고 타임지 기자에게 털어 놓기도 했다. 알리가 한때 그를 엉클 톰’, ‘고릴라라고 조롱해 수십년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프레이저는 자신이 했던 거친 말과 행동들에 대해 알리에게 모두 용서를 구했다.

같은 흑인으로 백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어려운 생활을 이겨내고 복싱으로 성공한 프레이저와 알리의 진정한 모습은 미디어의 연출에 가려 오히려 가려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프레이저의 경우는 더욱 많은 것이 실제 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프레이저는 갔지만 우리들은 그가 남긴 미디어의 이미지로만 그를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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