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송형석 (계명대학교 체육대학 교수)
알맹이가 중요할까 껍데기가 중요할까? 당연히 알맹이가 중요하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느냐고 핀잔듣기 십상인 물음이다. 껍데기는 단순히 알맹이에 부수하여 그것을 돋보이고
꾸며주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기 때문에 알맹이가 껍데기보다 중요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중시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금의 소비 경향을 일컬어 “상징적 소비”라고 표현한다.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때문이 아니라
상징가치나 기호가치 때문에 상품을 구매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성능 때문이 아니라 외관과
디자인 때문에 자동차, 냉장고, 청소기 같은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옷의 경우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의복의 본질적 기능, 즉 사용가치는 보온과 보호, 가림 기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색상이나 디자인 또는 상표 때문에 의복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명품”의 구매 심리에 이러한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 껍데기를 중시하는 경향은 모든 사회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경제 영역을 넘어서
정치, 나아가 개인의 일상 영역에까지 파죽지세의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2006년 서울시장
후보에 올랐던 오세훈과 강금실의 대결에서 오세훈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의 훤칠한 외모와 멋진 몸매가 유권자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심어주었고, 주저 없이 그에게
한 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비밀이다. 당시 대중매체는 이를 두고
“감성정치”의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지, 상징, 외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껍데기는 일상생활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배우자 선택에서부터 신입사원 선발, 나아가 사회적 성공에 이르기까지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능력 있어 보이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는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보다는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이, 즉 알맹이가
견실한 사람보다는 껍데기가 번지르르 한 사람이 선호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껍데기를 가꾸는 일은 일생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2006년 말 개봉되어 수 개월간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했던
“미녀는 괴로워”가 그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수이다. 가수에게 있어 알맹이는 목소리와
가창력이다. 반면에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양은 목소리와 가창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일종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양자를 모두 겸비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꼭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어야만 가수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자, 심수봉 등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은 대개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타고한 미성과
풍부한 가창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미녀는 괴로워”에서 진짜 가수는 찬밥
신세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대는 립싱크가수가 인기를 독차지 한다. 진짜는 적절한 껍데기를 갖추지
못했기에 푸대접을 면치 못했고, 가짜는 껍데기가 좋아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결국 껍데기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주인공은 껍데기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성형과 스포츠로 자신을 완전히
재포장하여 신상품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껍데기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스포츠의 역할도 바뀌기 마련이다.
스포츠는 다양한 몸짓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한 몸짓의
활동으로 그치지 않고 몸짓을 통해 내면적인 그 무엇을 고양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어 왔다.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협동심”, “인내심”, “극기의 정신” 등이 전통적으로 스포츠라는
일련이 몸짓을 통해 고양시키려고 했던 내면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스포츠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내면적인 것”에서 “외면적인 것”으로, 즉 알맹이에서 껍데기로 뚜렷하게 바뀌고 있다.
“날씬한 몸”, “근육질의 몸”, “에로틱한 몸”이 스포츠참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포장 제조기로서의 스포츠 역할은 비단 개인의 몸 가꾸기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지역 사회나
국가 같은 집단은 물론이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재를
포장하여 결국에는 인정과 승인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재현 및 상징 기제의 역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은 단순한 월드컵 4강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은근히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4강의 의미로까지 확장되어 해석된다. 100m 세계기록갱신은 단순한 선수 개인의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체재가 추구하는 비가시적 인류 진보를 가시화시켜 주는
사건으로 재해석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스포츠는 개인과 집단, 나아가 전 인류에게 기존 자본주의
질서를 믿고,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는 환상적인 껍데기 역할을 담당해왔다.
탈주술화, 합리화, 세속화의 기치 아래 효율성과 효용성이 모든 가치의 척도 역할을 해왔던
근대화과정에서 이와 같이 신비주의화, 미학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이미 그러한 속성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그 상품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큰 맘 먹고 산 상품이 기대와는 다르게 전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구매는 일종의 모험일 수밖에 없다. 기대는 해석의
방식이다. 그것은 가시적인 상품의 외관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판매자는
잠재적인 구매자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기대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결국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할 필요가 있다. 구매자를 유혹하는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상품의 외관을
미학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미학의 논리는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껍데기의 중요성이 역설되고 있다. 한편 껍데기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과대 포장이 등장하였고, 나아가 알맹이와는 상관없는 껍데기, 소위
“탈맥락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 껍데기 아닌 껍데기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껍데기는
더 이상 알맹이를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몰아내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가사세계와 가시세계, 원본과 이미지, 진리와 허구, 진짜와 가짜의 전도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껍데기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경향과 관련하여 “확실히 기호화되는 물건보다
기호 자체가, 원본보다 복사본이, 현실보다 환상이, 본질보다 외관이 더욱 선호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 오직 환상만이 신성한 것이고 진실은 세속적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리가 감소되고
환상이 증가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신성성은 더욱 고양된다고 여겨지고 있고, 그 결과 최고도의
환상이 최고도의 신성성이 되고 있다.”고 썼다.
알맹이가 중시되었던 문화에서 스포츠철학자들은 스포츠가 인격 같은 알맹이를 가꾸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애써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제 껍데기가 중시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스포츠가 껍데기를
만드는 데 탁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해야만 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 입장에서 이러한 경향을 싸잡아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이러한 현상을 적절한 언어로 설명함으로써 개인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만족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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