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남상우 (충남대학교 박사)
왜놈에게 짓밟히고, 서구 문물에 주눅들고. 반만년의 역사를 외쳐왔던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이처럼 기 한번 못 펴고, 자신감을 상실한 나날이 꽤 길었다. 그로 인해 우리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못다 핀 꽃 한송이처럼, 남보다 못하다는 열등의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것을 우리는 ‘한(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풀어야 할 그 무엇.
다행히, 이러한 우리의 열등의식을 순간이나마 풀어주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스포츠
스타다. 우리가 국가대표 경기에 목매는 이유, 상당 부분 이처럼 한의 문화로 설명될 수 있는데,
스포츠를 통해 대리경쟁을 경험하고, 거기에 몰입하여 한을 풀어버리는 현상. 오늘날
국민스포츠 스타를 만들어낸 문화적 기저라 하겠다.
“박찬호, 박세리, 박지성, 박태환, 김연아”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스포츠 스타? 그렇다. 또 다른 건 없을까?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입지를 굳힌 자들? 그럴 수 있다. 또? 돈 많이 번 스포츠 스타? 그건 빼자. 공통점을 찾으라면
많이 찾을 수 있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시기는 다르지만, 다소 옛날이나 지금이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국민스타’다.
먼저 박찬호. 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97년, 그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미디어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그 무엇이었다. 박세리는 어땠는가? 그녀 또한
박찬호와 같은 시기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 진출하여 세계 최고가 되고, 국난극복의
상징이 되어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인물이다. 박지성, 박태환, 김연아는 또 어떤가? 무슨 말이
필요한가. 오늘날 최고의 스포츠 명사를 꼽으라면 단연 이들 셋을 뽑을 수 있으리라.
프리미어리거로서 훈남의 타이틀을 얻으면서 1등 신랑감으로 거론되는 박지성. 2008베이징
올림픽 수영 부문에서 금메달을 따낸 박태환과 그랑프리 피겨대회를 석권한, 신세대, 김연아.
실로, 이들이 있어 우리의 삶은 행복했고, 이들은 우리를 대신해 ‘한풀이’를 해줬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최초’와 ‘최고’
그렇다면 이들이 스포츠 스타로서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게 된 이유를 설명해보자. 나는
그 기저에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특히 '최초'와 '최고'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
최초와 최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만은, 우리의 경우 조금은 특별하다. 상당히
집착한다. 오죽하면 윤치호가 자신의 일기(1921년 4월 19일자)에다 “조선인들의 큰 결점 중
하나는 작은 것을 경멸한다는 점...거창한 것, 거창한 이름, 거창한 쇼를 선호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의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이 실패를 맛 본 가장 큰 원인”이라고 적었을까.
이와관련하여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한국인 코드’(2006, 인물과사상사)에서 최고와 최대
그리고 최초라는 담론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집착하는 문화적 코드라고 적으면서,
우리같이 ‘세계 최고’, ‘동양 최대’, ‘세계 최초’를 좋아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그만큼 우리는 최초와 최고, 여기에 ‘최대’라는 수식어구를 좋아한다. 이것이 일종의 자존감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하나의 콤플렉스에 불과할 수 있다.
한신대 교수 윤평중(2005.12.01, 중앙일보, 31면)이 지적했듯이, “크고 강한 것, 최초와 최고에
대한 집착은 언뜻 보면 우월의식인 것 같지만 기실 열등감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최초’와 ‘최고’를 담지한 스포츠 스타들
이처럼 최초와 최고를 지향하는 우리의 심성이 열등감의 현현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는 어떤 차원에선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에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열거한 선수들의 공통점을 다시 한 번 찾는다면 무엇이 될까? 그렇다. 모두 자기 분야에서
'국내' 혹은 '동양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발견될 수 있다.
박찬호. 아시다시피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90년대 후반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그의
방송중계는 한국인의 희노애락을 결정짓는 그 무엇이었다. 박세리 역시 한국 최초의
‘LPGAer’이자 최초의 마스터즈 대회 우승자로 명성을 높였다. 국난극복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니, 그 인기는 말로 해 무엇하겠는가? 박지성은 어떤가? 말할 것도 없이 한국 최초의
‘프리미어리거’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스타 1위에 꾸준히 랭크되었다. 가끔 사람들은
축구국가대표가 A매치에서 죽쑤면 전력을 분석하기 보단 박지성을 찾곤 한다.
박태환 역시 한국 최초의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이며, 김연아는 한국(동양) 최초의 피겨
그랑프리 전대회 석권자이자, CF에서 가장 선호되는 명사이기도 하다.
물론, 무조건 ‘최초’가 되었다고 국민스포츠 스타의 명성을 누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이
동경하는 그 무엇에서의 최초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구라 하면 미국의 MLB요, 골프는
PGA와 LPGA다. 축구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가 세계 3대 리그로 자연스럽게 거론된다.
수영은 어떤가? 한국은 수영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짧은 팔다리와 몸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피겨스케이팅에서도 마찬가지다. 쇼트트랙 이외에 동계스포츠 중
생각나는게 뭐 있었는가?
이처럼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최초’를 달성하고, 또 나아가 거기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우리의 한풀이를 해준 것에 대한 잠재적 고마움 때문에 그들은 국민스포츠의
칭호를 가지며 인기를 누리게 된 것 아닐까? 필요조건으로서의 ‘최초’와 충분조건으로서의 ‘최고’가
결합된 스포츠 스타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들을 동경한다.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나니 연구실 친구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던지더라.
“야, 그럼 하승진은?”(한국 최초의 NBA 진출 선수)
뭐, 언젠간 국민스포츠 스타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 굳게 믿을 뿐이다.
ⓒ 스포츠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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