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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니체, 원초적 본능의 미학

                                                                                            글/박미영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영화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로틱 스릴러(erotic thriller)의
대표적 영화이다. 영화에서 보여 지듯 성욕과 폭력성은 인간의 오래된 욕망인 식욕과 성욕,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본능을 암시한다.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가? 샤론스톤이란 여배우의 뇌쇄적인 에로틱한 섹시심벌(sexy symbol)은
우리에게 자극적인 ‘쾌’를 가져다주었고 영화는 제목에 충실하여 인간의 원초적 욕망
매우 인상 깊게 표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수많은 위협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부여받은 능력이 바로 본능인 것이다. 그리고
본능을 유지하기 위해 발생하는 욕구를 우리는 본능적 욕구라고 하며 이러한 본능적 욕구는
외부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이러한 욕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도 상당히 위협적이기도
하지만 더욱이 절제되지 못한 또 다른 욕구와 결부되면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일으킨다.
영화에서 보여준 살인 등의 폭력적인 장면 등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으로서 에로스(eros)는 단순한 성(sexual)에 대한
인식으로, 신체적인 정욕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통하여 에로스를
사랑의 신, 즉 이성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신으로 혼돈 속에 질서를 낳는 모든 ‘생명의
원동력’
으로 정의한다. 에로스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것 중의 하나로서 예술과 종교, 사회,
경제, 삶, 죽음
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또한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기도 한 에로스는 우리의
생활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플라톤(Platon)은 에로스를 ‘사랑’에 집중하여 관심을 가졌으며,
니체(F.W. Nietzsche)는 ‘충동’에, 프로이드(G. Freud)는 ‘성’에, 라캉(Jacques Lacan)은 ‘욕망’에
집중하였다. 또한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에로스를 경제와 관련하여 ‘비생산적 소비’라고
규정하고 이것이 인류의 생존조건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점은 에로스가 단순한 성적인
쾌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프로이드는 인간을 성본능과 죽음 본능이라는 두개의 본능을 쫓아 사는 동물로 간주하였다.
그는 에로스의 개념을 일종의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에로스를 성의 본능과 결부시켜
리비도(Libido), 즉 ‘정신 에너지(psychic energy)’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성적 본능을 프로이드는
‘죽음 충동’을 의미하는 타나토스(Thanatos)로 분류하고 에로스를 생의 충동, 즉 자기 보존의
성적 충동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이 에로스가 ‘생의 충동’이라는 것,
‘죽음’ ‘생명’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점이다. 또한 1940년에 발견된 라스코의 동굴벽화에서
바타이유는 성과 죽음을 동시에 그린, 죽는 순간폭력을 매개로 한 성과 죽음의 결탁을 보았다.
에로스에 대한 성의 연구가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계기는 바타이유에
의해서일 것이다. 니체의 추종자였던 바타이유는 에로티즘(érotisme)을 생식을 위한 성행위와
쾌락을 위한 성행위로 구분하였는데, 바타이유가 말하는 에로티즘이란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쾌감’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성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라스코의 동굴 벽화에 그려진
죽음의 본능과 성의 본능은 결국 하나의 ‘삶에의 힘’이다. 그것은 프랑스 사람들이 흔히 성행위의
오르가즘의 순간을 “작은 죽음(petite mort)”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우리는 죽음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적인 행위 속에서도 이미 언젠가 죽게 될 죽음의 미래를 맞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 역시 이렇게 시작된다. 



                                                          
<라스코 동굴의 ‘우물’벽화>
       
성기를 곧추세운 채 무너져가는 새의 얼굴을 한 남자의 이미지. 에로틱한 열정을 드러낸 남성의
발기된 성기, 내장이 터진 들소, 이 그림에서 바타이유는 성과 죽음의 일치를 보았다.

인간의 본성에 가장 관심을 보였던 철학자 중에서 니체를 빼놓을 수 없다. 원초적 본능에 의한
인간의 욕구는 니체가 철학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니체는 인간의 마음에는 다섯
마리의 늑대가 산다고 하였다. 그 다섯 마리의 늑대는 이성이라는 철장 안에서 갇혀서 언제나
뛰어 나올듯한 기세로 거세게 철장을 뒤 흔들며 살고 있다고 한다. 늑대를 가둔 철장은
소크라테스를 대변하는 주지주의이며 이것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 역시 
이성과 논리에 의해 억제되고 통제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역사는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단죄하고 억압하였기 때문에,
니체는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통제 불가능한 감정(본능과 광기)들을 밖으로
표출시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Dionysisch)적 충동'으로
매 순간을 흥분하고 강렬하게 느끼고 극단적으로 살라는 의미로서, 카타르시스(katharsis)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미학과는 달리 흥분과 선동의 이론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인간 본연의 모습인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다. 물론 니체가 통제 불가능한
감정을 표출하라고 한 것은 본능과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도록 표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양하게 변질되어 주체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욕구가 중대한 범죄행위로 나타나고, 그것이
미화되고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에서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인간의 본능과 광기에 대한 해결 수단으로 무엇을 제시했을까? 니체는 인간
존재방식과 치유방식에 예술을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방법으로 전개시켰다. 인간은 춤을
춤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능과 광기를 승화시킬 수 있고, 자신을 자유롭게 하며 기쁨을
전해주고, 삶에 대한 긍정을 상징화한다고 하였다. 니체의 예술은 '힘에의 의지'와 관련하여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체인 신체를 매개로 역동적이며, 정적이고 폐쇄적인
것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생동감이 넘친다. 결국 예술 안에서 인간의 본능은 미화되고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예술 안에서 인간은 삶의 공포나 인간의 불합리성과
진리를 통찰하게 되고 죽음에 이르는 공포까지도 자유롭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인간 본능은 잘 길들여진 욕구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힘에의
의지’이고, 예술을 위한 가장 훌륭한 정신에너지인 ‘예술로써 가능한 삶’, ‘예술로써 승화된
삶’
을 의미한다. 즉 그의 철학의 원초적 본능은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 고통과 희망, 충동과
절제, 절정과 정화’
의 자유로운 감각과 감흥을 지닌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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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강영계(2002). 니체의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예술의 의미. 인문과학논총. 38.
조르주 바타이유 / 유기환 역(2006). 저주의 몫·에로티시즘. 서울: 살림.
http://blog.naver.com/dudwlsting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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