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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마라토너 영웅들의 감동 스토리- 민족과 국민의 설움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달려 세계에 알리다.

 

글/ 윤동일 (국방부)

 

         역사적으로 약소민족에게 있어 스포츠는 피지배에 대한 설움을 달래고 침략국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저항하고, 복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 되어 왔다. 스케이트 살 돈이 없어서 돈이 들지 않는 마라톤을 선택했던 고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은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 민족에게 한없는 감동을 주었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42.195km를 달렸지만 마지막 골인하는 순간에 보인 선명한 태극기와 시상대에서 조차 금메달을 목에 걸고서도 기미가요가 흐를 때 고개를 떨어뜨렸던 장면(황영조 선수와 대담에서 "지금 젊은 사람들은 나라 없는 설움에 대해서 모른다. 내가 우승한 뒤 일본 국가가 연주될 때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벅찬 감동이자 비장함이다. 이 날 관중석에는 골인장면을 지켜보면서 목이 터지도록 애국가를 부른 안익태 선생도 있었다.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은 마라톤 1인자라는 단순한 의미를 뛰어 넘어 국민들에게 일제에 항거하는 정신적 상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인터뷰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기쁨보다 알지 못할 설움만이 복받쳐 오르며 울음만 나옵니다. 남승룡과 함께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남몰래 서로 붙들고 몇 번인가 울었습니다. 이곳의 동포들이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1936년 8월 9일 인터뷰) 특히, 김구 선생은 나라 없는 한국청년이 올림픽에서 우승했다는 나라 잃은 설움과 그 청년이 지원병으로 필리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일본이 허위 유포한 소문)에 그리고 올림픽 우승의 장대한 기록이 독립되지 않으면 그냥 묻힐 것이기에 독립의 감격으로 세 번 울었다고 밝히기도 했다.(1946년, 베를린올림픽마라톤 우승 10주년 기념식에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입상한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모습

 


  예로부터 스포츠 선수 특히, 마라토너들은 외국의 압제에 맞서 싸웠던 군인이자 용감한 투사였다. 이런 현상은 약소국가이면서 외국의 침략을 받은 나라일수록 두드러진 공통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세계 여러 나라의 손기정 선수들을 만나보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가난한 구두공장에서 생계를 꾸려 나갔던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은 나찌의 점령기를 거치며 힘없는 나라의 현실을 체험하면서 종전 후 해방조국의 군대에 자원하여 입대하였다. 완전군장을 매고 달리기 연습에 매진했던 청년 자토펙은 전후 처음 열린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여 10,000미터에서 우승하였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4년 뒤 열린 1952년 헬싱키대회에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5,000미터, 10,000미터 그리고 마라톤까지 장거리 세 종목을 석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 장거리 종목을 모두 석권한 사례는 자토펙 이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육상 계에서 전설 그 자체가 되었다. 명실상부한 스포츠 영웅으로 이름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육군의 육상팀 코치를 맡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독일에 이어 조국을 강점한 소련에 항거한 그는 체코 독립선언(1968년 ‘2천어 선언’이라 함) 가담하여 반소민주화 운동과 ‘프라하의 봄’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잡은 체코 공산당은 그를 육군 코치에서 해임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1990년 체코 민주화 이후까지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2000년 겨울 프라하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서 당시 국제육상연맹회장(라미네 디아크)의 애도사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그가 4개의 금메달을 따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온몸을 던진 투사였기 때문이다.”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자토펙과 알란미뭉

 


  늘 자토벡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위의 자리에 있었던 알제리 출신의 한 무명 선수가 있었다. 알제리는 역사적으로 지단, 앙리 등 유명한 축구선수를 배출한 나라로 스포츠에서 만큼은 자부심이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1830년 프랑스에 점령당하여 무려 132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한일 합방을 전의 기간까지 포함하면 약 반세기 정도였던 우리보다 무려 세 배의 기간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핍박과 설움의 정도는 가히 짐작이 된다. 1954년 전국에서 무력봉기를 시작으로 무려 8년의 독립전쟁을 통해 1962년에 비로서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때문에 우리의 손기정 선수처럼 프랑스 국기를 달고 뛰었던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알랑 미뭉’이었다.  세 번의 올림픽에 도전했던 그는 1948년 런던에서는 1만미터에서 1952년 헬싱키에서는 5천미터와 1만미터에서 체코의 영웅 자토벡의 산을 넘지 못하고 만년 2위의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도전은 자토벡과 함께 1956년 멜버른대회에 마라톤으로 출전하였다. 늘 막판에 자토벡에게 역전당했던 그는 레이스 도중에 줄곧 뒤를 돌아보며 자토벡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으며 영원한 리이벌 차토벡을 뒤로 하고 선두로 골인했다. 우승한 미뭉에게 다가와 뜨거운 축하의 포옹을 한 사람은 바로 자토펙이었고, 이 두영웅은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자들에게 “식민지 조국의 국민과 이 기쁨을 함께 하겠다.”고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앞서 소개했던 맨발의 군인 아베베 하사(下士, 병사 보다는 위이지만 장교보다 아래인 간부의 계급)는 식민지였던 조국 에티오피아와 민족의 한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침공한 이탈리아를 징벌하였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마라톤은 유서 깊은 콜로세움을 출발하여 로마의 시내와 교외를 돌아 베네치아 광장에 이르는 코스에서 진행되었는데 결승점인 베네치아 광장은 과거 무솔리니가 2차 세계대전을 알리며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이탈리아 국민과 장병들을 선동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양을 치던 한 목동이 12살 어린 나이에 황실 근위병에 선발되어 하사 계급장을 달고, 맨발로 로마를 정복하여 민족의 한을 풀었던 당대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의 조국이 강하게 시련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고 전했고, 이후 우리나라에도 방문하여 “나는 어려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황실 근위대 선배들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던 것을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며 한국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강조한 바 있었다.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를 비롯하여 자토펙, 알랑 미뭉, 아베베에 이르는 이들은 모두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달렸던 피디피데스의 후예들이다. 우리가 특별히 마라톤의 우승자에게 ‘영웅’이란 칭호를 붙여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나치 홍보를 위해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베를린올림픽을 기록영화로 제작한 리펜슈탈 여성 영화감독은 손기정·남승룡 두 선수의 기록을 남기며 “진짜 묘한 느낌이었다... 승자가 그토록 영광스러운 순간에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진솔한 감정을 털어놨다. 히틀러의 의도대로 독일의 약소국 침략을 정당화해야 했던 그녀는 어쩌면 스케이트 살 돈이 없어서 마라톤을 선택해 온갖 고난과 수모를 겪으며 골인한 그들이 왜 가슴의 국기를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떨 군 채 시상대에 올라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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