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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마라톤 영웅들의 감동 스토리 -몸이 불편한 것이지, 정신이 불구(不具)는 아니다.

 

 

글/ 윤동일 (국방부)

 

         유럽을 잉태한 마라톤 전투의 위대한 가치만큼이나 마라톤 영웅들의 다양한 스토리는 인생 그 자체이다. 2시간을 넘게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경기다 보니 초인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지만 42.195km의 긴 여정에 도전하는 이들의 스토리는 우리의 다양한 삶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이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달렸고, 어떤 이는 나라 잃은 약소민족의 희망을 위해 달렸으며 어떤 이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달렸다. 그리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라톤에 도전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토너들의 진한 감동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몸이 불편한 것이지, 정신이 불구(不具)는 아니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가장 개인적인 관심을 끌었던 선수는 우사인 볼트도(자메이카 단거리 스피린터), 이신바예바(러시아 장대높이뛰기)도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종아리뼈가 없어서 생후 11개월 만에 두 다리의 무릎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 의족에 의지한 채 정상인들과 함께 400미터 육상경기에 출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레이드 러너(블레이드 의족을 달고 달리는 것에서 유래한 별명)’로 불리는 의족 스프린터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각주:1]였다. 양쪽 혹은 한 쪽 다리가 없는 장애 세계기록을 보유한 그의 기록은 45.07초로 휠체어 경기의 세계 일인자 중국의 장리신과 같은 기록이다. 비장애인 경기의 세계기록인 미국의 마이클 존슨이 1999년에 세운 43.18초에는 2초 이상 늦은 기록이지만, 한국 기록(손주일 선수가 1994년에 세운 45.37초) 보단 0.2초 빠른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기록만으로 볼 때, 휠체어와 의족에 의존한 그들과 겨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없다고 보면 된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남아공의 피스토리우스 역주 모습

400미터 육상 세계기록 비교

 

 

스포츠에는 불구(不具)의 몸으로 또는 심각한 부상을 극복하며 세계 정상에 선 초인들의 역사는 무수히 많다. 올림픽에 국한하여 소개하더라도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요약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초기 올림픽에는 정식종목 가운데 지금은 없어진 스탠딩 육상종목이 있었다. 말 그대로 제 자리에 서서 높이뛰기, 멀리뛰기, 세단뛰기를 하는 경기이다. 미국의 ‘레이 어리’는 소아마비로 평생을 휠체어에 실려 살기 싫어서 시작한 체조와 점프 덕분에 대학 육상부 주장까지 맡으면서 1904년부터 4개 대회에세 모두 10개의 금메달과 3개의 신기록을 수립하였고, 미식축구 선수로도 뛰었다.

 

미국의 검은 진주 ‘윌마 루돌프’는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22명의 형제 중 20번째로 태어나 성홍열, 소아마비, 폐렴을 앓으며 11살까지 목발에 의지하며 살았다. 친구들처럼 뛰어 놀 수 없어서 바구니에 농구공을 던지며 놀았던 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걷는 연습을 했고, 결국 중학교 농구선수가 되었다. 이후 육상에 관심을 보인 그녀는 16살의 나이로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고,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는 단거리 종목(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에 출전하여 세 종목 모두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그밖에도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미국의 ‘월터 데이비스’도 휠체어에 의지했던 소아마비였고,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 8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딴 ‘조아킴 크루즈’는 오른발이 왼발에 비해 짧았다.

 

이 올림픽 영웅들은 소위 말하는 ‘절름발이들’이었다. 아예 손과 발이 없었던 선수들도 있었다. 헝가리 권총사격 국가대표였던 ‘카로리 타카스’는 군인으로 1938년 훈련 중에 불의의 수류탄 폭발사고를 당했다. 오른손잡이 사격선수가 오른 손을 잃었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슬픔과 좌절을 딛고, 주변의 걱정과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못할 이유가 없다며 다시 권총을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왼손을 오른손처럼 사용하며 균형을 잡고 새로운 사격감각을 만드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그의 피나는 노력은 불과 1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는 올림픽 우승을 목표로 맹훈련에 돌입했다. 그의 노력은 10년 만에 달성되었다. 그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여 속사권총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42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2회 연속 정상에 올랐다. 그가 젊었을 때 오른 손이 하지 못했던 일을 선수로는 중‧노년기에 들어 왼손이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또 다른 헝가리의 신화는 수구(水球) 선수 ‘올리버 할라’이다. 11살 때 전차(tram)에 치어 한 쪽 다리의 무릎을 절단해야 했던 그는 재활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수영에 몰두하여 유럽선수권대회 1,500미터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구로 전향하여 헝가리 국가대표의 주전으로 96경기에 참가하였다. 올림픽은 1928년 암스텔담대회부터 모두 세 번을 출전하여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소위 외팔과 외다리 선수들이 정상인들을 물리치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그런가하면 경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부상이나 예기하지 못한 상황을 강인한 정신력과 투혼으로 극복한 사례도 많다. 1896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싸이클 도로경기는 아테네에서 출발하여 마라톤까지 왕복하는 87km 구간에서 열렸다. 그리스의 ‘콘스탄틴 티니디스’는 마라톤까지 선두를 유지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다른 선수와 충돌하며 자전거는 부서졌고, 부상도 입었다.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 그는 경기 보조원의 자전거를 빌어 타고 다시 달렸다. 아테네에 들어서며 그에게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한다. 길에 나온 사람을 피하려다 또 벽을 들이 받았는데 자전거는 망가졌고, 부상도 심했다. 대충 치료를 받고 난 그는 이번엔 관중의 자전거를 얻어 타고 1위로 골인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의 몸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표정에는 수많은 고난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다.”고 적었다.

 

1908년 런던올림픽 남자수영 800미터 계영경기에 출전한 헝가리 팀은 2위 영국 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영자(泳者)인 ‘졸탄 할메이’는 레이스 도중 발생한 근육경련으로 갑자기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근육경련은 정도와 무관하게 일단 한 번 발생하면 더 이상의 경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할메이는 세 번씩이나 텀벙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사력을 다해 2위로 골인한 후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권투 라이트급에 출전한 헝가리 ‘임레 하란기’는 국내 경기에서 다친 코 때문에 수술을 권유 받았지만 올림픽을 앞둔 그는 수술을 미뤘다. 올림픽을 마친 후 코의 부상은 더욱 악화되었지만 시상대의 가장 위에 설 수 있었다.

 

1956년 멜버른에서 1960년 로마대회까지 투원반 올림픽챔피언이었던 미국의 ‘알 오터’는 1962년 국내 경기 중 목뼈를 다쳐 1년 넘게 깁스를 하고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일주일을 앞두고 겨우 깁스를 풀긴 했으나 여전히 부목에 붕대를 감은 채 경기에 출전했다. 좋은 자세와 높은 집중력이 필요한 경기에 부자연스런  부목과 붕대는 행동을 제한했기 때문에 성적은 좋을 리 없었다. 세 번째 시기를 앞두고 오터는 붕대를 풀어 부목을 제거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마치 누군가가 내 갈비뼈를 뽑아내는 것 같았다.”라고 털었던 그의 성적은 세계 신기록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까지 석권하며 16년간 올림픽 4회 연속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되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1964년 도쿄올림픽 남자혼영의 강력한 우승 후보인 미국의 ‘리차드 로스’는 경기 이틀 전 심한 복통으로 병원에 급히 후송되었다. 맹장염을 판정한 의사들은 당장 수술을 권유했으나 이 17살의 청년은 “수술이나 받으러 여기 온 것이 아니다.”라며 수술은 물론 진통제도 거부하고, 얼음찜질만으로 경기에 임하여 자신의 기록을 무려 3초나 단축하면서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미국의 다이빙 황제 ‘그렉 루가니스’는 88올림픽의 가장 영웅적인 선수로 평가된다. 그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세계대회에서 19연승을 기록했고,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스프링보드와 다이빙 두 종목을 석권했던 우승후보 영순위였다. 그런데 예선전에서 도약대에 머리를 부딪쳐 8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대부분 이런 경우라면 경기를 포기했을 법한데 그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다이빙에서 최초로 올림픽 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렉 루가니스(1988년, 미국 스프링보드)  카로리 타카스(1948·1952년, 헝가리 속사권총) 

윌마 루돌프(1960년, 미국 육상) 알 오터(1960·1964년, 미국 원반던지기)

 

 

 

 

ⓒ 스포츠둥지

 

 

  1. 피스토리우스는 1986년 생으로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2012년 런던 페럴림픽에서는 400미터 계주에서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며 우승하며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으나 2013년 2월 14일, 여자 친구 살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