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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왜 프로야구는 재미있을까?



                                                                                                   글/김정효
(서울대학교 강사)

 

야구만큼 재미있는 스포츠가 따로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발끈할지 모른다. 그래도 한국의 프로야구는 재미있다. 오죽 했으면 야구 경기를 한 편의 드라마나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겠는가. 야구 경기에는 확실히 승리와 패배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복기의 묘미가 있다.
 
무사만루의 찬스에서 득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9회말 투아웃에서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다.
이것이 야구의 재미를 증폭시키는 주요한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승부의 향방과 감동은 야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스포츠는 재미와 감동의 DNA를 갖는다. 그런데 왜 유독 프로야구에만 구름관중이 몰리는 것일까.


2011년 프로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다. 600백만을 넘어서더니 어느새 1,000만의 목표치를 내걸고 있다. 머지않아 허세가 아님을 입증할 날이 올 것 같다. 이런 호시절에 프로야구의 인기 비결을 묻는 일은 새삼스러울지 모른다. 혹자는 WBC의 준우승과 베이징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을 거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IT의 수준만큼 프로야구의 플레이 자체가 향상되었고, 이것이 재미를 배가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미디어의 분석은 상투적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지적은 아니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같은 잣대를 축구에 적용하면 2002년 월드컵의 4강 신화와 현재 프로축구 경기장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우생순의 여자 핸드볼은 또 어떤가. 프로야구의 재미와 감동을 말하기 위해서는 여타의 스포츠 종목과 다른 프로야구만의 특별한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다름의 구조를 설명하지 못할 경우 스포츠의 일반적 특징을 동어반복으로 열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야구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재미와 감동의 원인이 드러난다. 기호학이란 사회현상을 기호로 간주하고 그 의미작용을 밝히는 학문이다. 가령 강남은 한강 이남을 뜻하는 행정단위이지만 그 단어의 의미는 일의적이지 않다. 어떤 이는 '부자 동네''부동산'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룸싸롱'을 연상할지 모른다. 이처럼 강남이라는 기호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기표(記票,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e)의 자의성 때문이다. 프로야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야구장을 찾고 TV 중계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단순히 신체의 움직임이라는 기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전하는 기의를 해석하고 공유한다. 프로야구의 문화기호학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프로야구의 재미는 무엇보다 경기의 진행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시즌이 시작될 즈음 미디어의 프로야구에 대한 홍보는 새로운 시즌의 개막혹은 대장정의 시작으로 표현된다. 이때 개막(開幕)이라는 기표 속에는 흥행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뿐 아니라 대서사시의 막이 오른다는 두근거림이 내포되어 있다. 대서사시란 무엇인가? 군웅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모험과 대결의 파노라마가 아닌가.

프로야구의 시즌 전체가 서사시적 성격을 갖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시리즈의 우승이라는 목표를 두고 펼치는 각 팀의 대결이 전쟁의 웅장한 서사를 은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삼국지나 여타의 무협지와 다른 긴장을 환기시킨다. 무협지가 중원정복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일회적이고 완결된 구조로 보여주는 것임에 반해 프로야구의 이야기는 1년을 주기로 반복되어진다. 여기에 지난 시즌의 영광과 좌절, 도전의 희망과 복수에 대한 염원, 그리고 패권(覇權)의 기호들이 뒤얽히면서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장정의 기표가 프로야구만큼 어울리는 스포츠는 달리 없다.


1년 주기의 페넌트레이스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그것이 일상적인 삶의 주기와 겹친다는 점에 있다.
프로야구는 개화의 봄에 시작해서 늦은 가을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이 시합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거르지 않는 게임의 진행은 이벤트성이 강한 축구와 대비되는 야구만의 특성이다. 축구는 게임의 성격 상 매일 진행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게임 결과에 대한 희비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든다. 요컨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과 다음 주를 기약하는 것에는 많은 긴장과 흥분의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페넌트레이스는 경기의 결과를 일상 속 깊숙이 개입시킨다. 그것은 전날 벌어진 시합의 내용과 결과에 대한 갑론을박에서 샐러리맨들의 아침 대화가 시작되는 살가운 풍경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즌의 진행과 일상의 깊은 관계는 승수의 축적이라는 또 다른 기호를 통해 드러난다. 페넌트레이스의 중요한 전략이 여기에 숨어 있다. 1위부터 꼴찌까지의 순위와 게임차는 응원하는 팀에 대한 희망의 게이지이며, 이 수치의 등락과 더불어 팬은 일희일비하고 어느새 대장정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승리의 축적과 순위의 상승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기호가 바로 가을야구이다. ‘가을이라는 기표는 수확의 기의와 함께 서사시의 결말 부분까지 살아남고 싶다는 바람과 우승에 대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염원의 메시지가 투사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야구는 게임이 갖는 판타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스포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갖는 게임으로서의 판타지성은 컴퓨터 게임의 그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한다는 것과 가상이 아닌 현실의 판타지라는 점이 2차원의 평면 공간에서 펼쳐지는 놀이로서의 게임과 다르다. 그리고 이 판타지는 전쟁이라는 기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프로야구에는 다른 스포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전쟁의 기표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가령 단타를 소총으로, 홈런을 대포로 비유하거나 투수에 따라붙는 폭격기잠수함등의 기표들은 모든 포지션을 전투의 진지로 만든다. 그래서 감독은 쉽게 야전사령관으로 분()하게 되며, 그가 펼치는 작전과 선수의 기용을 통해 게임 전체를 전장(戰場)으로 탈바꿈시킨다. 전쟁의 판타지는 팬들로 하여금 더불어 싸운다는 일체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관중의 동원이라는 기표 속에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을 응원하는 민초의 함성이 교묘히 깔려 있게 되는 것이다. 응원의 함성은 승전보를 바라는 민초들의 고함에 다름 아니며, 프로야구는 이런 숨어 있는 전쟁의 알레고리를 통해 관중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은다.

프로야구는 가상이 아닌 3차원의 공간에서 남성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상력을 구현한다. 허구적이지 않은 판타지의 미학. 이것이 프로야구가 갖는 게임의 이중성이며 이 역설적인 미학 때문에 팬은 매 경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판타지에 대한 열광은 현실의 팍팍함과 일상의 고단함이 더할수록 날로 증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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