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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사

일제는 왜 우리의 웃터골을 빼앗았는가? 글 / 조준호(대림대학 사회체육과/ 교수) 인천체육의 성지 웃터골공설운동장(현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은 인천시민의 애국심발원지(發源地)였다. 그곳은 항상 인천시민들의 땀 냄새, 운동장의 흙냄새, 그리고 바닷가의 짠 냄새가 뒤섞여 인천특유의 냄새가 뿜어지는 가장 향토색이 짙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한·일간의 야구대결이 있을 때면 인천시민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가슴에 품고 그들과 함께 달렸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였지만 웃터골에서 만큼은 야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를 응원할 수 있어 뜨겁게 용솟음치는 애국심을 달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웃터골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분지였기에 정확한 생성 시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천부민과 함께한 웃터골은 개항기 스포츠의 산실이었다. 그곳을 확장,.. 더보기
올림픽 최초 우승자에게 수여한 상은 무엇일까? 글/ 김복희 (안동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올림피아 제전경기 우승자에게 수여한 상은 야생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 코티노스(Cotinos)였다. 올림피아의 올리브 나무와 올리브관에 대한 기원은 헤라클레스와 관련이 있다. 신화에 의하면 야생 올리브 나무는 헤라클레스가 아르테미스에게 바칠 암사슴의 황금뿔을 구하기 위하여 히페르보레아(Hyperborean)의 땅에 갔다가 올리브 나무를 가지고 와서 올림피아에 심었다. 헤라클레스는 엘리스를 점령한 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올림피아 제전 경기를 창설하고 형제들과 달리기 경기를 해서 이긴 사람의 머리 위에 야생의 올리브 나무 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로 델포이의 신탁을 듣고 상으로 야생 올리브로 관을 만든 사람은 이피토스 왕이었다. 7회 이전.. 더보기
귀족계급과 서민들의 신체문화 차이는? 글 / 하웅용(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체육사학에서 가장 비중 없는 부분은 서양의 중세일 것이다. 통념적으로 중세의 신체문화는 다른 문화처럼 별 볼 것 없는 암흑기로 치부되니까!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치부하기에는 중세의 기간이 너무도 길다. 중세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 말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인 15-16세기에 이르는 1천년 이상의 긴 기간이기 때문이다. 천년동안 모든 이에게 절제된 수도원의 생활(종교적 생활양식)이 강요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신체문화는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중세에도 다양한 신체문화가 존재하였고 즐겼다. 중세의 신체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편견은 반복적 학습에서 온 “학문적 게으름”인 것이다. 그럼 중세 신체문화의 진실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 더보기
체육인과 조선시대 무인들의 공통점 글 / 나영일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 조선시대는 양반사회! 500년간 지속된 조선시대는 양반사회였다. 문반과 무반으로 나누어지는 양반제도는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다. 문인에 비해 무인의 대우와 평가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렇게 낮지 않았다. 그동안 문인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문인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과 생각이 너무 높아서 무인은 천시되었다고 잘못 생각했을 뿐이다. 과거시험으로서 문과와 무과가 실시되었는데, 공식적으로 3년에 한번 문과는 33명, 무과는 28명씩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국방의 상황 그리고 경사가 있었을 때 과거시험은 때때로 실시되었고, 어떤 경우에 만과(萬科)라고 하여 만명이 넘게 많은 인원을 뽑아 부실하게 운영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무과는 약 200여회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