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윤영길(한국체육대학교 사회체육학부 교수)
그렇게 기다리던 4년이 또 여지없이 이렇게 오고야 말았다. 4년 전 지단의 박치기로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버리더니 모두를 기다리게 하고 다시 남아공에 모여들었다. 4년 전 그 선수들도 있고 젊고 새로운
선수도 있다. 메시나 호날두, 파브레가스처럼 풋내기로 겨우 2006 월드컵팀에 합류해있던 선수들이
그 4년 동안 변태(變態, metamorphosis)를 거쳐 세계 축구의 중심선수가 되어 있다. 짧아 보이는 4년은
이렇게 많은 변화를 세계 축구계에 남겨놓았다. 우리의 이청용과 기성용, 이승렬이 변태한 것처럼......
대~한민국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만들어진 팀
1986년 박창선의 골로 시작해 2006년 원정 첫승, 그렇게 대~한민국은 월드컵에 연속적으로 출전해
흔적을 남겨왔다. 물론 대부분의 경기를 패배로 마무리했고 마치 남의 잔치에 잠깐 구경 온 것처럼
승패보다는 득점을 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해오곤 했다. 그렇게 1986년부터 매번 월드컵에 무의미
하게 다녀온 것 같지만 월드컵에 다녀오면서 대~한민국은 잠재적 학습을 통해 시나브로 세계 축구의
표준에 대~한민국을 접근시켜왔다.
대~한민국 축구는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90분을 소화할 수 있는 체력을,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을 경험하면서 세계표준의 전술과 더불어 심리적 적응성을 축구선수의 유전자에 각인시켰다. 특히,
2002년과 2006년 양 대회에서 선수들이 얻은 세계 축구에 대한 자신감은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축구선수 모두의 집단 무의식에 각인되어 이제는 월드컵에서 정상적인 자기
플레이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팀에는 얼마 전까지 나타나던 후반 중반 이후의 급격한 체력 저하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후반 중반 이후 조커를 투입하는 전술운용이 정착되었고, 유럽팀 선수를 만나도 주눅 들지 않고,
경기력 향상을 위해 스포츠과학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등의 변화가 일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변화 중 “심리적으로 만들어진 팀”이라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특징은 이전의 대표팀과 구분되는
확연한 기준이다.
G 세대 “양박쌍용”
박지성과 박주영, 이청용과 기성용을 축구팬들은 양박쌍용으로 부른다. 척박한 땅에서 양박쌍용이
어떻게 자라났을까? 200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 보자. 박지성이라는 무명의 선수를 2002대표팀에 발탁
했을 때 박지성에 대한 평가는 “왜 육상선수를 뽑았냐”는 비아냥이 있었다. 그 박지성은 2002년
포르투갈전을 거치며 심리적인 도약을 경험한다. 우리의 뇌리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포르투갈전
그 골이 양박쌍용의 심리적 출발점이었다. 그 골은 박지성에게 경기장에서 어떤 상대를 만나도
여유를 선물했고 그 여유는 에레디비지에, 프리미어리그에서 성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박지성
에게 대한민국 축구선수의 유전자에 각인되어온 세계축구에 대한 두려움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변이는 공명을 일으켜 다른 축구선수의 유전자와 경기장에서의 행태에 변화를 일으켰다.
박지성을 위시한 다른 선수들의 변이는 새롭게 축구를 시작하는 어린 선수에게 유럽의 메이저 리그도
해볼만하다는 대리 경험을 통한 자신감 형성의 단초를 제공했고, 박지성의 성장에 고무된 어린 선수
들은 어렵지 않게 유럽리그를 꿈꿀 수 있었다. 한편 박주영에게 월드컵은 아릅답지 못한 기억이다.
2006년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너무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그 무기력의 트라우마를 박주영은 2년
남짓 앓았다. 그렇게 심리적 좌절을 겪으면서 박주영은 성장했고 다시 팀의 주축으로 대~한민국에
섰다. 이 월드컵은 박주영의 축구 인생에 중대한 갈림길이 될 것이다. 자신의 플레이를 한다면 다시
도약을 일으키겠지만 혹 지난 스위스전의 트라우마가 덧난다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청용, 기성용은 지금까지의 축구선수와는 다른 경로로 선수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래서 자유롭다.
대~한민국 축구선수에게 부족하다고 지적되었던 창의적 플레이, 생각하는 플레이의 답을 가진 선수들
이다. 중학교 때 이미 FC서울에서 훈련을 시작해 학원축구의 평준화된 훈련을 받은 선수와는 다르게
다른 축구를 보고 자랐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격려해주는 분위기에서 운동을 해왔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경기장에서 실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리고 어떤 대~한민국 선수보다 볼 컨트롤이
좋다. 이렇게 유럽리그라는 개인적 목표와 박지성이라는 성공 사례, 개인의 역량이 어우러져 기술적,
전술적, 심리적 도약을 일으킨 진화된 선수가 성장하게 되었다. 이 도약의 발판에는 박지성의
포르투갈전 골이 있었고, 그 골의 영향은 수비를 완전히 읽고 상황을 점령해 만들어낸 이청용의
프리미어 리그 데뷔골에서 확인된다. 대~한민국 팀의 2010월드컵 최대의 수혜선수는 월드컵 경험만
추가하면 선수로 성장할 조건을 대부분 충족시키게 될 이청용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감독 허정무
2010월드컵의 보이지 않는 최대의 실험은 감독 허정무이다. 2002년 히딩크, 2006년 아드보카드에 이어
도약이 일어난 대~한민국 팀의 최초의 내국인 감독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2006월드컵 후 다음 월드컵
감독은 국내 지도자 중에 누군가를 선택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의 시설
인프라, 선수의 역량 등 축구 도약을 위한 제반 여건이 개선을 넘어 도약에 이르렀는데, 지도자
영역만이 오히려 정체되어 있는 현실적 제약이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결국 대~한민국 축구가 변화
하기 위해서는 팀이 변해야 하고, 팀이 변하기 위해서는 선수가 변해야하고 선수가 변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변해야 한다. 결국 경기력 향상 생태계의 출발점이 지도자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변하지 않고
변화를 기대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다. 또한 월드컵의 승리나 성적의 결실 역시 대~한민국
선수는 경험했지만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경험하지 못해 선수나 지도자의 괴리가 커져가는 치명적
문제로 작용한다.
허정무의 도전은 보이지 않지만 대~한민국 축구를 위해, 허정무의 성공은 대~한민국 지도자의 지도력
자신감을 향상시켜 주기에 의미가 크다. 또한 허정무의 도전 자체가 대~한민국 지도자의 상실감을
보상해주는 커다란 동인이 될 것이다. 2010 허정무의 경험은 대~한민국 지도자에게 지도자 스스로를
돌아보는 또 한 번의 계기를 제공할 것이고, 이 계기는 방향만 적절하다면 대~한민국 축구 도약의
촉매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2010 허정무의 도전을 맹목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맹목의 진화와 퇴화
대~한민국 허정무에 대한 맹목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허정무이기 때문에 맹목이 아니라 내국인
지도자이기 때문에 맹목이다. 내국인 지도자에 대한 지지는 편협한 국수주의라는 목적이 아니라
축구를 도약시키기 위한 대~한민국 지도자 변화의 수단이다. 붉은 악마를 기억한다. 맹목적으로
대~한민국 축구를 추종하던 그 붉은 악마에게 이제 맹목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기업에 점령당한
응원 공간을 서울시청에서 코엑스로 옮기기도 하고 기업이나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맹목이
진화해 합리적 판단과 결정을 하곤 한다.
2002년 4강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대한민국 국민의 대~한민국 팀에 대한 기대수준은
4강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16강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만도
대~한민국이 속한 조의 다른 세 팀의 FIFA 랭킹을 모두 더해도 대~한민국 랭킹보다는 작은 수가 되는
현실에서 세계 축구의 벽을 실감한다. 목표를 높게 잡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목표는
실패의 반복으로 이어지고 장기적으로 무력감을 형성해 목표 자체를 버리게 한다.
2010월드컵, 16강에 진출하면 정말 좋은 성과이고 혹시나 8강, 4강에 진출한다면 엄청난 성과이다.
붉은악마를 자처하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월드컵 16강을 당연시 여기는 누군가가 있다면 현실과
가능성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자. 대한민국 대표팀의 월드컵 중기목표는 16강! 또 배울 수 있는 기회
가 2010년 대~한민국 축구에 주어졌다. 월드컵 성과보다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한 경기 한 경기 차분하게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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