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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1968년 세계테니스 사상 첫 프로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한 프랑스오픈 테니스선수권대회

1968년 세계테니스 사상 첫 프로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한 프랑스오픈 테니스선수권대회

 

 

  시민항쟁이 오늘날의 최고 테니스 그랜드슬램대회인 프랑스오픈을 만들었다. 지난 5월 24일 개막한 올 시즌 두 번째 테니스 메이저 대회 프랑스오픈의 역사는 지난 1968년 5월 혁명으로 최고의 변곡점을 맞았다. 1968년 프랑스오픈은 세계 테니스 사상 프로에게 첫 문호를 개방한 메이저대회였는데, 뜻하지 않게 대회 기간을 전후해 역사적인 '68혁명'을 맞닥뜨렸다.

 

  68혁명은 프랑스 드골정부의 실정과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저항운동과 총파업 투쟁으로 시작됐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최고의 지성인 실존주의 사르트르와 미셸 푸코 등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한 이 혁명은 교육 체계와 사회문화라는 측면에서 '구시대'를 뒤바꿀 수 있는 기회로 보였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던 것이다. 이 혁명은 미국, 일본, 독일 등 수많은 자본주의 국가에 개혁 의지를 전파했다.

 

  처음에는 파리의 몇몇 대학교와 고등학교, 대학 행정부와 경찰에 대한 학생봉기로 시작했다. 드골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저항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는 운동의 열기만 점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경찰과의 가두 전투를 일으켰다. 결국 프랑스 전역의 학생과 파리 전 노동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노동자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드골 정부는 이러한 시위자들에 대항해서 군사력을 동원했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1968년 6월 23일에는 다시 총선을 실시했다.

 

  프랑스테니스연맹의 오픈 대회조직위는 대회 시작 5일전인 그해 5월22일 파업으로 마비된 대중교통과 첫 프로선수에게 지급할 상금문제를 이유로 대회 취소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프로선수 때문에 상금 10만프랑(현 시세 14만1천달러, 약 1억6천9백만원)의 추가적인 비용이 필요했고, 관중들이 소요사태로 경기장을 오지 않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역에서 소요를 막기위해 바리케이드가 설치돼고 군경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

 

  허나 우려는 쓸데없는 걱정에 지나지 않았다. 관중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업으로 개인시간이 많아진 시민들은 경기장인 파리 롤랑 가로 스타디움으로 찾아왔다. 관중수는 12만명으로 전년도 대회에 비해 3배나 늘었다. 프랑스 스포츠신문인 레퀴프지에 따르면 5월 30일 2라운드에서 드골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라디오로 듣는 관중들의 소음 때문에 심판들이 자제를 요청할 정도였다.

 

  그 이전까지 아마추어에게만 출전을 했던 프랑스 선수권대회를 80여년만에 오픈대회로 바꾸는 혁명적인 변화를 꾀했던 1968년 프랑스 오픈에 참가하기 위해 각국의 선수들은 항공 등 운송수단이 마비돼 비상수단을 써야했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여러 이동경로를 통해 파리에 어렵게 입성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베 세갈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국 포드 무스타탕을 구입해 비상기름통을 싣고 파리에 도착했다.

 

  68년 프랑스오픈대회 남자단식 우승자인 미국의 켄 로스웰은 가장 불편한 여행을 했던 선수였다. 파리 공항이 통제되는 바람에 로스웰은 미국 뉴욕에서 파리 남쪽의 브레티니쉬르오르주 군용 비행장에 도착해 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많은 선수들은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남자 1라운드에서 30명이 불참했다. 16명의 시드배정자 중 루 호드, 얀 코데스, 니콜라 피에트란젤리 등 프랑스오픈 우승자 등이 참가하지 않았다. 흑인 선수 최초로 미국오픈(1970) 등에서 우승을 차지한 아서 애쉬는 이 대회에 아마추어로 참가하려 했는데, 끝내 항공편 때문에 불참했다.

 

  1968년 프랑스오픈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프로선수들이 처음으로 출전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성공적으로 경기를 마칠 수 있었다. 비록 대회 기간 중 신문이 발행되지 않았고 소요 사태가 계속됐지만 경기는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68혁명 시위는 프랑스오픈이 끝난 6월초 진정됐으며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68년 프랑스오픈은 주위의 타이밍과 여건이 비록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불을 붙일 역사적인 스토리를 선보일 수 있다면 세상의 공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대회였다. 50년이 지난 프랑스오픈은 클레이코트만의 대회로 그랜드슬램 테니스대회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1968년 프랑스 5월혁명에서 대학생들이 파리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프랑스오픈테니스 대회는 시위와 파업으로 세계테니스사상 프로가 처음으로 참가하는 1968년 프랑스오픈을 취소하려고 했었다. 사진은 게티이미지 제공.>

 

 

 

<1968년 프랑스오픈 남자단식서 우승을 차지한 미국의 켄 로스웰(가운데). 사진 AP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