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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남북체제의 바로미터, WTF와 ITF

글 / 김학수

 

 

  10년만에 방한한 북한 태권도 시범단은 화끈했다. 2017 무주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에서 보여준 북한 태권도 시범은 남한 태권도와 많이 달랐다. 온 몸을 무기로 삼아 격파 위주의 호신술로 일관했다. 시범단은 음악이나 안무도 없이 손기술 위주의 격파만을 선보였다. 한 동작, 한 동작에 절도있는 자세와 힘을 실어 공격적인 시범을 연출했다.


  이에 반해 남한 태권도 시범은 발기술 위주로 음악과 안무가 어울어진 ‘종합 예술’을 보는 것 같았다. 호신술이라기 보다는 상상력을 가미한 다양한 율동과 리듬을 살리는 ‘매스게임’ 연기에 가까웠다. 여러 사람이 태권도 동작을 이용해 부드럽고 자연스런 선과 공간을 활용하는 예술적 행위를 하는 듯했다.


  남북태권도는 남북한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한 핏줄이면서도 체제의 벽에 가로 막혀 반백년 이상 다른 세상에서 사는 모습이 태권도라는 스포츠를 통해 잘 드러났다. ‘선군정치’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체제의 북한은 태권도를 철저히 체제에 훈육화된 종목으로 바꿨다. 자유화, 민주화의 기치를 내세운 남한은 태권도를 개성과 창의성을 살리는 스타일로 세계화에 성공했다.


  WTF(세계태권도연맹)와 ITF(국제태권도연맹)는 남북한 체제 경쟁이 극심했던 지난 1960, 70년대 탄생했다. WTF는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을 발판으로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했던 초대 총재 김운용씨가 창설을 주도했다. ITF는 남한에서 군장성을 지내고 말레이시아 대사까지 지낸 최홍희씨가 원래 남한에서 창설했다가 1972년 박정희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겪게 됨에 따라 캐나다로 망명하게 되면서 북한의 지원을 등에 업으며 WTF의 라이벌 단체로 부상했다. 

 
  WTF와 ITF는 남북한 체제의 바로미터이기도 했다. WTF는 해외 태권도 사범을 대거 파견하며, 세계선수권대회, 지역선수권대회, 국제친선대회및 국제지도자강습회, 국제심판강습회, 시범경기 등을 정기적으로 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서 시범경기로 채택된 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정식종목이 발돋음하면서 세계적인 종목으로 자리잡았다. IOC가 인정하는 태권도 종목의 국제경기연맹도 WTF다.


  WTF가 이처럼 스포츠로 발전했던데 반해, ITF는 무술의 형태로 바뀌어갔다. 최홍희씨가 펴낸 육군 태권도 교본에서부터 시작된 ITF는 북한의 지원과 관심을 받으며 WTF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2002년 최홍희씨의 사후 분열양상을 보였던 ITF는 최홍희씨의 아들 최중화가 이끄는 일파, 북한 IOC 위원 장웅계가 주도하는 일파 등으로 나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북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TF는 WTF의 위세에 눌려 동유럽, 중앙아시아, 몽골, 중국 등 구 공산권 국가들에 해외 시범단을 파견하는 정도에 머물며 크게 위축된 상태이다.


  WTF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경기규칙과 용어 등을 새롭게 바꾸고, 종목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난 1973년부터 사용되는 영문 약칭 WTF를 WT로 변경을 검토하는 것도 이러한 변화 작업의 일환이다. 그동안 영어 이니셜 WTF가 영어권의 가장 흔한 비속어 약자인 ‘What the fudge(What the fuck을 조금 순화한 말)’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쳐 개명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2017 무주 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 기간중 영국 BBC가 보도했다.


  조정원 WTF 총재는 “디지털 시대에 WTF라는 단어는 조직의 기대와 상관없이 부정적인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세계 태권도팬들과 소통과 공감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세계적인 종목으로 자리잡아가는 태권도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WTF 명칭을 새로 바꿀 계획”이라고 밝혔다.


  BBC에 따르면 2015년부터 단체 명칭에 관한 브랜드 변경 작업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난 24일 전북 무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을 앞두고 열린 총회에서 관련 논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따로 성장한 WTF와 ITF이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한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남북한이라는 이질적인 체제와 시대의 변화로 인해 각각 다른 행보를 걸어왔지만 태권도의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앞으로 밝은 미래를 위해 이제는 상생과 통합의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