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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인재육성사업 알림

매체가 만들어내는 승리, 그리고 맥거핀

 

 

 

 

글/박현애(이화여자대학교 및 동대학원 강사)

 

      일반적으로 스포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승패, 결과라고 생각하곤 한다. 스포츠에서의 승리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고, 끊임없는 도전, 고통스런 과정의 승화로 매우 숭고하게 여겨지는 반면, 승패는 그것에 연연하여 대중의 무지몽매함을 표면화 시킨다며 저급한 문화로 스포츠를 끌어 내리곤 하는 양날의 칼이다.

 

스포츠의 궁극은 승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가치 및 아름다움에 있고, 승리는 작은 이벤트에 불과하다고 많은 체육학자들이 주장하지만, 이러한 측면은 여전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곧 있을 런던올림픽에서도 우리 선수들의 인생과 열정, 노력들은 금은동메달 이라는 성적에 의거하여 들여다보여지고 평가될 것이다. 이 또한 4위 이하의 선수들에게 허락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총 금메달 획득 개수에 따른 종합 순위에 시선이 떠나지 않을 것이며, 매체는 가끔 있을 비인기 종목의 승전보에 제 2, 제 3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영화를 재현하여 새로운듯하지만 종국엔 신파로 끝날 이야기들을 구성하고 선수들을 한시적 영웅, 혹은 강한 의지의 불쌍한 헝그리어들로 만들 것이다.

 

영화계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과 프랑수와 트뤼포 감독의 대담을 통해서 유명해진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이 열차 안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A: 선반 위에 있는 게 뭔가요?
B: 맥거핀입니다.
A: 맥거핀이 뭐죠?
B: 스코틀랜드 고지대에서 쓰이는 사자 잡는 도구입니다.
A: 스코틀랜드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B: 아, 그래요? 그럼 맥거핀은 아무 것도 아니군요.

 

맥거핀(Macguffin)이란 히치콕 감독이 종종 자신 영화의 서스펜스를 극대화 하기위해 사용한 것으로 영화 구성상의 속임수이며 스토리에서 중요하지는 않으나 마치 중요한 듯 노출하여 관객이 그에 주목하게 만드는 장치를 의미한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3에서의 ‘토끼발’과 같은 것을 맥거핀이라고 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되는지 영화의 결말부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토끼발은 그 영화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결국 맥거핀은 영화에 극적 몰입을 불어 넣는 인위적 장치인 것이다.

 

스포츠에서의 승리, 전적으로 맥거핀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승리는 속임수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가공된 극적 장치는 더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포츠를 이야기하는 매체에서 간혹 스포츠의 승리를 맥거핀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한체육회

 

한때, 열정과 의지, 과학적인 훈련과정과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으로 이겨낸 선수들을 우유가 먹고 싶은 라면소녀로, 어머니에게 강한 심장을 물려받은 해녀의 아들로, 가난한 가정에서 허리띠 졸라 멘 항상 배고팠던 소년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물론 이를 통해 많은 국민들이 힘을 얻고 불우한 가운데 지치지 않은 의지와 열정에 박수를 보냈지만, 동시에 성공한 운동선수의 상징을 전국민적인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그들의 과학적인 훈련방법, 자신만의 인생관, 스포츠관,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정, 스포츠에서의 도와 예, 몸에 대한 남다른 이해 등의 다양한 시선대신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위한 희생자로 고착시켰다.
 
매체가 주목하는 이러한 특성은 스포츠 영화에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애환이 담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그 외의 많은 영화는 비교적 진실된 스포츠 현장에 근거하고 그 안의 많은 이야기들을 의미있고 훌륭하게 이끌어 냈다. 그러나 동시에 스포츠 영화는 진부한 공식과 표현, 상투적으로 빠지는 클리셰(cliche)에 그치지 않은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스포츠와 운동선수에 대한 매체들의 조명은 이를 대하는 대중에게 많은 감동과 희망을 주고 스포츠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을 자아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지없이 운동선수를 불쌍한 헝그리어로 그려낸다. 혹은 결핍된 인간의 고군분투, 성공기로 마무리하곤 한다.

 

물론 이러한 신파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한정되어 있다. 승자 혹은 메달권에 진입한 선수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매체는 스포츠를 자체로서 보기를 거부하는 듯하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공하고 날인한다. 지구촌의 축제라 찬사하면서 동시에 우리 선수들이 이겨야하고 우리나라가 몇 위를 했는지에 주목한다. 평화와 인류애에 대한 이야기는 개막식과 폐막식에만 존재하고 이내 사라진다. 이도 맥거핀이다. 스포츠 행위 자체나 행사의 목적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으며 스포츠에서의 승리는 일차적 생각에 멈춘다. 스포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이 승패에 의지하여 성립하니 스포츠의 목표도 승패에 머물 수 밖에 없는지 모를 일이다.
 
올림픽, 즉 스포츠를 통한 인류의 화합과 통합은 팀원 간, 국가 구성원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체를 통하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규칙을 준수하는 가장 순수한 상황에서 서로의 기량을 다투지만, 이는 순수한 상태에의 인간에 의한 가장 인간적인 이벤트이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무기 없이 겨루고, 희생이나 살생 없이 화합하고 통합할 수 있는 인류애의 가능성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세계적인 박람회나 예술제가 해낼 수 없었고 스포츠만이 희미하지만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종국에는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라 여겨지는 것은 많은 의식 있는 스포츠팬(이들을 스포츠필리아sportphilia 라고 해야할까.. 영화에 남다른 애정으로 흥행이나 자극성보다 예술성과 작품성에 주목하는 이들을 시네필cinephile 이라고 일컫듯이)들은 매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공된 승리와 선수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매체에 의해 가공된 이슈들 외에도 자신의 가슴을 움직인 어느 선수의 플레이, 어느 한 게임에 주목하고 이를 인생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가슴에 새겨 넣을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올림픽을 통해 평화와 인류애를 갈구하고 기원할 것이다.

 

 

런던 올림픽, 이번에는 올림픽에 대한 본질과 스포츠 고유의 아름다움, 내적 가치와 선수들에 대한 보다 진실한 이해가 함께 되는 첫 단추이길 조용히 그러나 간절히 바래본다.

 

 

 

 

 

ⓒ 스포츠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