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영길(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얼마 전 제주시 지역리그에 참여하고 있는 제주 시내 4개 초등학교의 선수를 대상으로 한 멘탈코칭 프로그램을 대한축구협회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다. 초등학교 선수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고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선수들에게 심판은 공정하냐고 물었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니오”라고 힘주어 대답했다. 어린 선수에게 반문했다. 그럼 누가 경기에서 이득을 얻은 거지?
심판을 위한 변명
선수는 경기에서 심판은 공정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심판이 경기에서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선수는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심판은 공정하려 노력해도 공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종료될 때까지 연속적인 경기 흐름에서 순간순간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한 결정을 내리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마치 경기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선수가 없는 것처럼
심판 역시 경기에서 판정에 실수를 하지 않기는 어렵다. 더더욱 그런 것이 심판은 경기장에서 경기에 참여하고 있는 선수 전체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판단 오류의 가능성은 선수에 비해 훨씬 크다.
개인적으로 심판을 볼 기회가 잦다. 자격증을 가진 공식 심판은 아니지만 친선 경기나 수업에서 30년 이상 축구 경기의 심판을 봐왔다. 선수로 경기에 참여할 때보다 심판으로 경기를 진행할 때가 휠씬 힘들다. 선수로 경기에 참여할 때는 내 의지에 따라 플레이 상황을 만들어가면 되지만 심판으로 경기를 진행하면 선수의 플레이를 읽고 판단이라는 또 다른 과정을 추가시켜야 한다. 그래서 선수로 플레이를 진행하기보다 심판으로 플레이를 운영하기는 더 힘들다.
심판은 공정해야한다는 신념
우리의 비합리적 신념은 때로 우리를 힘들게 한다. Ellis는 인간의 비합리적 신념으로 “실수하면 안된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게 피해를 입히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등을 들고 있다. 사실 이러한 신념은 그 자체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실수하면 안된다는 신념은 불안감이나 초조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 실수를 수용하지 못해 자기비하나 우울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로 내가 많은 사람에게 양보하고 허용하면 정작 나에게는 나쁜 사람이 되고 결과적으로 내게 나쁜 사람이 되면 아무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내게 피해를 입힌 누군가에 복수를 하고나면 후련해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진 복수심의 자리를 불편함이 대신한다.
선수에게 경기장에서 일어나면 안되는 일을 물으면 대부분의 종목 선수는 심판의 편파 판정을 든다. 경기장에서 심판의 공정하지 않은 판정은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지만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인지 과정은 심판의 판정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페널티에리어 안에서 수비팀 선수의 손에 공이 맞은 직후 공격팀 선수와 수비팀 선수의 반응은 흥미롭다. 수비팀 선수의 손에 공이 맞는 순간 공격팀 선수는 심판에게 상대 손에 공이 맞았다고 적극적으로 심판에게 주장을 한다. 하지만 수비팀 선수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우리팀 선수 손에 맞았으니 페널티킥 줘야 한다고 나서는 수비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공수 모두 자신의 팀에 유리한 판정은 경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반면 자신의 팀에 불리한 판정은 경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변수로 증폭시킨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속이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심판은 공정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
심판은 여러 상황을 동시에 고려해 판단하고 결정한다. 상황을 지각하는 과정, 분석하는 과정, 판단하는 과정, 결정하는 과정 등 다양한 과정에서 오류 발생 가능성은 존재한다. 인간의 판단과 결정 과정에서는 다양한 오류가 발생한다. 이러한 오류의 대부분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발생하지만 때로는 알고도 묵인하는 경우도 있다. 심판이 판정을 하는 동안 의도하지 않아도 오류는 그렇게 발생하고 진행된다. 심판의 판단과 결정 과정의 오류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자연스러운 과정임도 불구하고 우리가 심판은 공정해야 한다는 신념을 유지하면 심판의 오심을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그래서 심판이 오심했다는 판단이 서면 날카롭게 각이 선 상태로 경기에 임하게 된다.
물론 심판이 판단과 결정 과정에서의 오류가 아니라 승부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판정에 드러내는 시도가 가끔씩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에서 진행되는 심판의 판정에도 어느 정도의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심판은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볼 수 없고 적절하게 판단할 수도 없을뿐더러 항상 옳은 결정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심판의 판정을 모두 모아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떤 경기에서는 우리팀이 유리한 판정을 하고 어떤 경기에서는 상대팀이 유리한 판정을 한다. 또 어떤 경기에서는 우리팀에 아주 유리한 판정을 하고 또 다른 경기에서는 상대팀에 아주 유리한 판정한다. 이렇게 심판의 판정을 모두 모아보면 심판의 판정은 결국 공정으로 회귀해간다.
심판의 오심은 기회
스포츠는 허구적 현실이다. 완전한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규칙에 따른 경쟁이다. 스포츠의 규칙은 현실에 허구성을 부여한다. 이종 격투기 선수를 보자. 두 선수가 링 위에 등장해 공이 울리면 사력을 다해 싸운다. 이내 공이 울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코너로 돌아간다. 하지만 다시 공이 울리면 다시 맹렬하게 서로에게 덤벼든다. 그러다 공이 울리면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기 코너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두 선수가 일상 속에서 링에 올라가 감정이 상해 싸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싸움을 말리기 위해 공을 울려도 싸움은 지속된다. 규칙이 부여한 허구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포츠에서 규칙을 집행하는 심판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선에서 허구성을 유지시키는 존재이다. 그래서 선수는 때로 심판을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심판의 판정을 자신이나 자신의 팀에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일도 경기 전략과 운영의 일부이다. 심판이 판정에 오류를 범하면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오심을 상쇄할 보상판정을 하기 위해 기회를 본다. 심판이 오심을 범하는 순간 피해를 본 팀의 선수는 흥분하게 된다. 그리고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한다. 그러면 심판은 화가 난다. 오심을 했다는 사실보다 선수가 거칠거 항의하는 상황이 더 크게 와 닿으면 심판은 보상판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심판이 오심하는 순간이 우리 팀에 우호적으로 판정을 해주는 심판을 만나게 되는 기회의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스포츠는
규칙에 의해 작동되는 허구성의 세계임을 다시 기억하자.
심판의 공정성
심판은 장기적으로 공정으로 회귀해간다. 하지만 심판을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경기에서 심판이 오심을 하면 흥분하게 되고 흥분한 결과는 오롯이 선수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선수생활을 하면서 경기에서 딱 한번 퇴장 당했던 경험이 있다. 대학 3학년 때 일본에서 경기를 하다 심판이 편파적으로 판정한다는 생각에 흥분해있었고 심판에 대한 불만을 상대 선수에게 표출한 플레이 덕분에 퇴장당하고 경기장을 나왔던 기분을 아직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 경험 때문에 개인적으로 심판의 판정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답을 찾으려했는지도 모른다.
심판은 상대적인 존재이다. 같은 대회에서도 심판의 판단 기준에 따라 다른 판정이 내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지난 경기와 다른 규칙이 이번 경기에서 적용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규칙은 그렇게 스포츠에 해석되어 적용된다. 심판은 공정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고 규칙은 심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는 점, 심판의 판정을 모두 모아보면 공정으로 회귀해간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심판의 판정을 수용하기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 심판의 판정을 수용하지 못하는 선수는 결국 판정 불만으로 인한 분노의 부메랑에 자신을 노출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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