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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세계축구 슈퍼스타 에우제비우, 위대함을 넘어 불멸로

글/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언론정보연구소장)



지난 5일 심장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뜬 포르투갈의 ‘흑표범’ 에우제비우의 부고를 전하는 미국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 눈에 확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Eusebio played down racial and national politics, praised others and denied stories about him that could have been turned into legend."

이 문장은 에우제비우는 인종과 민족적인 정치를 작게 다루고, 상대 선수를 칭찬하며 전설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부인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게다. 1960년대 펠레와 함께 세계 축구를 호령했던 슈퍼스타였던 그의 새로운 면을 알게 한 부분이다.


기사 작성자인 뉴욕 타임스의 원로 칼럼니스트 조지 벡시가 에우제비우를 뛰어난 축구실력 뿐 아니라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이로 평가한 것은 아주 신선한 의미로 다가왔다. 벡시는 에우제비우가 생전에 훌륭한 인품을 보여주며 여러 번 자신의 소신과 의지를 밝혀  부고 기사에서 충분히 인종주의와 식민주의를 싫어했다고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68년부터 뉴욕 타임스에서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벡시는 축구, 농구, 권투 등 다양한 스포츠에 관한 기사를 써오며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 왔는데, 이번 에우제비우 부고 기사 역시 베터랑 저널리스트다운 수준 높은 글이었다. 


보통 스포츠팬들이나 저널리스트들이 사실보다는 서사적인 무용담이나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선수를 넘어서 한 인간의 인생철학에 대한 세부적인 일면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벡시가 얼마나 철저하게 취재를 했으며, 선수에 관해 많은 자료를 갖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월드컵 축구대회를 8번이나 취재를 한 바 있는 벡시는 다른 어느 매체도 범접하지 못하는 뉴욕 타임스의 자랑인 부고기사(Obituary)에서 에우제비우에 대한 심도 깊은 기사를 쓰는 역량을 발휘하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벡시의 부고 기사를 통해 천부적인 재능과 실력, 의지 등을 갖춘 위대한 축구스타인 에우제비우는 비단 스포츠에서 이기고, 지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한 이로 스포츠사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불멸의 스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 같다.


벡시의 기사를 보면서 필자를 비롯한 국내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은 자성의 기회를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사 각도와 보도방법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들은 에우제비우에 대한 부고기사를 대체적으로 선수활동 경력 등에 초점을 두고 보도했다. 1960∼70년대 펠레와 함께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이름을 날린 전설적 인물로 1942년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 태어났으며 1960년부터 15년 동안 포르투갈 벤피카에서 활약하고 무려 11차례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어냈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9골을 터뜨리며 포르투갈의 3위 달성을 이끌었다는 정도의 내용이었다. 

좀 더 자세한 기사는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과의 준준결승에서 전반 25분까지 0-3으로 뒤지다 혼자 4골을 터뜨려 5-3의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었고, 1970년도 한국을 방문해 35m 대포알 같은 프리킥 슛을 성공시켜 당시 대표팀 골키퍼 변호영이 “그의 슛은 내가 겪은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고 했던 것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모 신문에서는 그의 자서전 ‘내 이름은 에우제비우’의 일화 등을 소개하며 ‘헝그리 정신’을 극복한 스포츠 스타의 상징으로 뻔한 스토리를 전했다.


이 정도로 그에 대한 부고기사를 처리하는 게 과연 합당한 것인가. 50대 이상들에게 유세비오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더 많이 알려졌던 1970년대 펠레와 함께 국내에서  최고의 세계 스포츠 스타로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에우제비우라는 점을 고려할 때, 뭔가 아쉬운 부분이 많다.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청소년 단일팀이 출전했을 때, 필자를 비롯한 많은 국내 보도진이 에우제비우를 포르투갈 현지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에우제비우는 벤피카 유소년 축구팀을 지도하는 고문을 맡았는데, 대회 스폰서인 코카콜라 측의 주선으로 한국 보도진과 격의 없이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차돌같이 단단한 몸이지만 키는 다소 작았다. 실제 축구선수로서 그의 키는 175cm 정도이지만 탄탄한 근육질로 체격이 더 커 보였다. “북한전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경기였으며 그 경기를 통해 축구선수로서 정점을 찍었다”며 에우제비우는 인터뷰한 기자들과 일일이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친절과 아량을 베풀었다.


(지난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 취재갔을 때 에우제비우와 찍은 모습. 에우제비우는 세계축구를 호령한 슈퍼스타였지만 다정다감한 이웃 아저씨같이 좋은 인상과 마음씨를 가졌다. ⓒ김학수)



에우제비우가 국내 보도진에게 다시 얼굴을 보인 것은 2002년 한· 일 월드컵 때였다. 포르투갈 TV 해설자로 방한한 에우제비우는 예선에서 한국과 한 조에 속한 포르투갈에 대한 전력을 묻는 국내 언론 취재진에게 전문적인 코멘트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불가능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던 북한과의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에서의 인상적인 경기를 기화로 세계축구의 ‘흑표범’으로 불렸던 에우제비우는 다른 어떤 선수들보다 많은 얘깃거리를 가졌던 스타였다. 1960년대 유럽축구무대에서 드물었던 흑인선수로서 세계적인 스타로 첫 주목을 받았으며 훨씬 연봉을 많이 주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지 않고 고국처럼 여겼던 포르투갈 축구를 지켰다. 경기가 끝나면 상대 선수들의 뺨을 만져주고, 포옹하는 따뜻한 우정을 주고받았던 그는 미국 프로야구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에 비교되기도 했고, 글로벌 스타로 크게 성공한 디디에 드로그바의 롤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난, 흑인, 식민주의를 극복한 한편의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그의 삶에 가려져있던 개인의 이면들을 국내 언론들은 제대로 들춰내지 못했다. 특히 남북한과 깊은 관련이 있는 위대한 축구 스타 에우제비우의 부고를 접하면서 느낀 점은 앞으로 국내 언론들이 좀 더 심층적이고 다양한 관점으로 선수의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기사를 많이 취급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선수이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라는 사실을 에우제비우는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말을 해주는 것 같다.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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