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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축구의 기원- 축구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일까? (4)


글/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축구이야기

축구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일까?


축구의 기원 ⑥ : 축구의 기원설그 논란의 끝


그동안 동서양 축구의 역사를 장황하게 더듬어 본 것은 현대의 축구가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이해하자는 측면도 있지만 축구라는 스포츠가 무엇 때문에 기원하여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되었는지를 보려 했던 이유도 있었다결론부터 말하면동양이든 서양이든 이미 고대부터 축구의 교육적 가치를 인식하고이를 군사훈련용으로 고안해 발전시켰으며 널리 대중화 시켰다는 사실이다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경기 모습으로만 보면 츄슈가 서양의 축구에 비해 현대의 축구와 유사한 경기로 보이는데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해 그토록 오래됐다면 왜 현대의 축구로 발전하지 못한 것일까또 오늘날 영국으로부터 이탈리아프랑스 등 역사가 오랜 국가들이 간혹 예선전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축구 강대국으로 최소한 한두 번의 세계대회 우승경력은 있기 마련인데 왜 중국만은 성적이 별로인가 하는 점이다거기에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긴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처음 츄슈를 시작한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FIFA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기도 함)이다전국책(戰國策)이나 사기(史記)에 의하면당시 츄슈가 가장 번성했던 임치(臨淄)에는 약 7만 호의 주택이 있었는데 여기 사는 주민들은 부유하기도 했지만 신체도 건장하여 음악을 포함해 다양한 문화활동을 영위했는데 스포츠로는 축국을 특히 즐겨 했다고 적고 있다츄슈는 춘추전국시대에 시작해 한나라와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송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우리나라에 처음 츄슈가 전해진 것도 당나라 시대로 보고 있어 위의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츄슈의 출현 시기를 좀 더 살펴보자기원전 403년부터 진()이 통일을 달성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일컫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이 시기에 특히 강성했던 연<<<<<<<>의 7개 나라를 일컬어 전국7<>이라 함.)’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제한된 공간에 너무 많은 국가들이 공존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국가의 생존을 위해 강한 힘이 필요했다춘추시대와는 달리 전쟁에 지면 한 나라가 소멸해 버리는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상황에서 나라의 생존과 번영은 곧 전쟁에서의 승패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은 곧 모든 국가들의 이상이자 모토가 되었다이처럼 철저한 약육강식의 시기에 강인한 체력과 신체를 단련하고고도의 정신력을 함양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덕목이었다이런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츄슈였다따라서 츄슈의 경기방식이나 규칙은 그리스나 로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다른 점이 있다면츄슈에서는 손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고골대에 공을 넣는 득점방식을 채택한 것인데 이로 인해 경기규칙이 다소 구체적이었다는 점은 서양의 그것과 대별되었다츄슈의 폭발력은 곧 대중 속에 강한 중독성을 가진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고급기야는 황실에 까지 보급돼 전성기를 누리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국기(國技)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츄슈의 위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패러다임이 있는데 시대의 특별한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츄슈도 이런 사상적 조류에 영향을 받았다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유가(儒家)사상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인()과 예()를 숭상하고겸허·온순·선량한 감정을 중시하며 위계질서와 중용을 강조한다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유교적 관점에서는 고대 사회의 야만스러운 풍속을 정리하고사회의 보편적 질서를 구현하는 일면이 있었다이런 유교의 사상적 특성에 격렬하고모험적이며 승리를 위해 피터지게 경쟁하는 원초적인 츄슈 본래의 성격은 부합되지 않았다이런 사상적 불일치는 결국 군자가 용기만 있고의리가 없으면 어지럽다.”는 기조를 낳았고결국 츄슈 본래의 모습도 변형시키기에 충분했다유교의 영향으로 츄슈는 더 이상 격렬한 경쟁을 강조하지 않으며 점차 예의와 수양을 위해 우아하고품위 있는 경기로 바뀌었다우스갯소리지만중국의 유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일면을 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828(추정더운 여름에 미국인 선교사가 고종황제를 초청하여 처음으로 테니스 종목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하였다한참 경기를 참관하던 고종황제가 대뜸 염천에 땀을 흘리면서 저런 일을 어찌 귀빈들에게 시키려 하는가빨리 하인들을 시켜서 하도록 하라!”며 호통을 쳤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또 다른 원인도 있다츄슈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인 당송의 시대에는 이를 군사훈련으로 삼은 것은 물론이고 통치자의 관심도 높아서 경기가 있을 때마다 황제가 직접 관람할 정도였다위에서 이렇게 좋아하니 아래에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그리하여 츄슈는 전국 어디서나 시간만 나면 즐겨하는 국기(國技)가 되었다그러나 당송에 이어서 등장한 원()의 시대에는 양상이 달랐다유목생활을 했던 그들은 대부분을 말 위에서 지내 차이로 인해 그리고 건국 당시부터 한족(漢族)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츄슈 금지를 법으로 정하기에 이르러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오락성과 방탕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사실 몽골은 말을 타고 하는 구기로 오늘날의 폴로(Polo)와 유사한 격렬한 기마격구(騎馬擊毬)를 즐겨 했던 사실에 기초해 볼 때츄슈를 배척한 핵심은 단순한 생활풍습의 차이에 기인한 이유도 있겠지만 한족(漢族)의 근간을 거부해야 하는 정치적 필요와 명분에 의한 것으로 무게가 실린다명나라 장수인 장사신의 시(“군사를 돌보지 않고 부녀자를 끓어않고주연과 축국을 즐긴다.”)나 소녀경의 한 대목으로 기녀들이 노는 모습이나 보며 그 자태를 즐기는 유희로 전락하고 말았다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이전부터 시작해 약 1천년 동안 성행했던 츄슈는 이후 더 이상의 발전을 꾀하지 못하고장구한 역사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츄슈는 군사훈련에 도입돼 널리 보급되기 시작해 황제가 즐겨 관람하며 전 국민이 즐기는 국기(國技)가 되었으나 유교의 등장과 원나라의 정책으로 스포츠가 아닌 기예나 유희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리해 보면 기원에서부터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에서 비롯하여 만인이 참가하는 스포츠로 대중화 되었다가 사상과 정책 기조의 변화에 따라 기교만을 겨루는 소수의 기예(技藝)로 전락했으며 다시 관상용으로 또는 한낱 기녀들의 희롱행위가 되고 말았다축구 종주국 영국에서 현대축구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19세기에나 들어서야 가능했음을 볼 때현대 축구와 가장 유사한 공놀이를 처음 고안하여 대중화에도 성공했으며 엄청난 저변과 정책적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3년 현재 중국남자 국가대표팀의 경우 FIFA에 가입된 약 200여개의 국가 가운데 고작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음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오랜 축구 기원설에 대하여도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이미 살펴 본 바에 의하면동양에서는 공통적으로 손의 사용을 금지했고특히 츄슈는 구장 끝에 6개의 구멍에 발로 차 넣는 것으로 승부를 가렸는데 반해 서양의 축구는 손의 사용에 대해 그 어떤 제한도 없었으며 득점 방식도 공을 상대 진영의 골라인을 통과시키거나 교회에 공을 들여 놓는 것으로 하였다특히영국에서 근대적인 축구가 자리 잡기 전까지는 손을 사용해 격렬한 몸싸움이 허용된 격투형 축구가 보편화되었으며 그 모습은 오늘날의 축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현대축구와 유사성 관점에서는 중국이 축구의 발상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영국은 오늘날의 경기 모습으로 규칙을 정비하고축구협회와 정식 대회를 조직하는 등 축구의 근대화와 대중화를 견인해 세계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축구의 종주국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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