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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전쟁에서 유래한 올림픽의 꽃, 마라톤 이야기 -인간은 ‘타고 난 마라토너’다.

 

글/ 윤동일 (국방부)

 

               지난 연재에서 고대올림픽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진 스포츠 종목의 대부분이 전쟁으로부터 유래하여 전쟁과 직접 또는 간접적인 관련성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달리기 종목을 비롯해 원반이나 창던지기 등 투척경기와 레슬링을 비롯한 격투경기 등 고대 올림픽 정식 종목들은 고대 그리스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주변의 열강들과 벌인 전쟁에서 생존하고,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 필요했던 전투기술과 전투상황을 상정해 스포츠로 승화시켰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두 라이벌 간의 숙명적인 대결이자 고대 세계사 가운데 가장 역사적인 사건(전쟁)에서 유래하여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관심 속에 거행되고 있는 종목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종목은 고대 올림픽에서 정식으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올림픽 종목 가운데 가장 먼 거리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Marathon)은 고대가 아니라 근대올림픽에 처음 소개된 후로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고, 올림픽 정신을 상징하는 의미로 가장 마지막 순서에 거행되어 ‘올림픽의 꽃’이라 불린다. 이제부터 마라톤이라는 스포츠 종목에 얽힌 엄청난 역사적인 배경과 사건들, 그리고 마라톤 영웅들이 만든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마라톤이 인류에게 미친 위대한 발자취와 그 의미를 되새겨 보려 한다.

 


1. 인간은 ‘타고 난 마라토너’다.
  인간은 외형의 신체기능만 본다면 다른 동물에 비해 나약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고, 사자처럼 강하지도 않으며 치타처럼 빠르지도 않고, 심지어 누처럼 다산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선택했고, 그에 걸 맞는 여러 능력을 허락했다. 동물과 다른 많은 능력 가운데 사고하는 능력과 함께 허락된 직립보행은 특별하고도 단연 으뜸이 된다. 특히, 두 발로 걸으면서 특화된 손과 발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다.


  엄지손가락을 구부려 다른 네 손가락에 맞대어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신체능력은 인간을 비롯해 일부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능력이다. 물론 지상에서 생활하는 모든 동물의 앞발에는 쉽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에도 심지어 박쥐에게서도 날개에 인간의 엄지와 같은 것이 있기는 하나 대부분 그 기능은 퇴화되었다. 독립된 엄지손가락은 구조상 다른 손가락과 대칭이 된다. 물론 손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고된 훈련을 통해 손 이외의 신체를 단련해 보다 더욱 정교한 능력을 갖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인에게 엄지손가락이 없는 일상생활은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엄지손가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두꺼운 테이프로 붙여 놓고 실험을 해 보라. 아래 첫 번째 그림에서처럼 어떻게 커피 잔을 들고, 연필은 어떻게 잡을 것이며 뜨개질은 과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농구, 탁구, 야구 등 손으로 하는 스포츠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실험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든 우리에게 엄지손가락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의식주 생활은 물론 모든 생활습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다른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유일한 이 특징은 아래 두 번째 그림에서 보듯이 물체를 잡을 수 있게 하고, 무언가를 높은 곳에 매달 수 있게 해 준다. 나아가 물체를 잡은 손에 힘을 배가시켜 몇 배의 힘을 배가하고, 잡은 물체나 도구를 이용하여 정교하고도 정밀한 작업을 가능하게 해 주며 다양한 표현(제스쳐)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다른 네 손가락과의 대칭적 신체구조상의 특징과 그 기능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Opposable Thumb’이라 부른다. 아마 인류가 창조한 모든 것이 엄지손가락에서 발현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엄지손가락의 기능

 

과연 인간의 다리는 문명을 이끈 손에 견줄 만할까? 아래의 그림과 표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은 다른 동물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한다면 빨리 달릴 수 없다. 인간 중에서 가장 빨라 번개로 불리는 사나이 ‘우사인 볼트(100미터 세계기록 보유자)’의 기록(9.58초)도 치타(3.3초)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동물들에 비교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곰(6.4초), 기린(7.1초), 하마(8.0초)나 코끼리(9.2초)처럼 우둔해 보이는 덩치 큰 동물에 비해서도 결코 빠르지 않다. 달리기 뿐 아니다. 인간의 멀리뛰기 세계 기록(8.95미터)은 임팔라(12미터)나 눈표범(15미터)에 미치지 못하고, 높이뛰기는 2미터의 신장에도 불구하고 고작 2.5미터에 불과하며 장대를 쓰더라도 6미터 정도인데 이는 고작 1미터 남짓한 신장을 가진 클립스프링거가 도약하는 높이(8미터)에는 미치지 못한다.

 

물론 모든 동물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비슷한 체구의 다른 네발 동물에 비해 약한 편인데 여기에는 신체구조상 한계와 비밀이 숨겨져 있다. 대부분 네 발로 달리는 동물들은 두 다리(앞발)로는 체중을 분산하고, 나머지 두 다리(뒷발)로는 추진력을 내며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두 발만으로 달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또한 다리 근육은 통상 속근(速筋, fast twitch)과 지근(持筋, slow twitch)으로 구분하는데 속근은 빨리 수축해 순간적인 파워와 속도를 발휘하지만 쉽게 피로하고 지치는데 반해, 지근은 수축이 느려 힘이나 속도는 떨어지지만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동물들에게는 주로 속근이 발달해 있어 속근과 지근이 절반씩 구성된 인간은 순간적이고 폭발적인 힘과 스피드를 발휘하는데 불리한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100미터 달리기

 

 그러면 장거리는 어떨까? 늑대나 리카온(아프리카의 개) 등 몇 몇 동물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포식자들은 오래 달리면 급상승 하는 체온 때문에 5분에서 길어봐야 10분 이상을 달릴 수 없다. 그러나 동물들의 이런 신체적 특징은 대부분의 포식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때문에 가젤을 사냥하면 10번 중 7번은 성공한다는 치타도 200미터 이내에서 결판을 지어야 하고, 덩치 큰 사자에게도 뛸 수 있는 거리는 고작해야 300미터 이내가 된다. 이 한계를 넘기게 되면 제아무리 동물의 왕 사자도 위험에 처하게 되며 특히, 치타는 생명을 잃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반면, 인간은 네 발에서 두 발로 진화하면서 다른 네 발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튼튼한 아킬레스건과 강한 심장 그리고 정교한 체온조절 능력을 갖게 되었다. 강한 심장과 빠른 신진대사로 적정 체온을 유지하면서도 근육의 피로도를 줄여 비교적 빠른 속도로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남아메리카에 사는 원주민 ‘타라우마라(Taraumara)’족[각주:1]은 변변한 운동화도 없이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허접하기 짝이 없는 샌달(sandal)만 신고도 150km의 거리를 달려 사슴을 사냥한다고 한다. 지금처럼 뛸 때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기능성 운동화는 찾아 볼 수도 없다. 아래 사진처럼 신발이라 해야 동물 가죽 한 장이 전부인지라 거의 맨발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바위를 오르내리며 이틀 동안 사슴을 추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냥이 개시된 초기에는 쉽게 도망가던 사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양상은 달라진다. 지루한 도망과 추적이 시작된 지 이틀째, 막다른 길에 몰린 사슴은 더 이상 달리기를 포기하고 제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이미 사슴의 발은 형편없이 찢겨지고 너덜거렸지만 타라우마라족 사냥꾼의 발은 멀쩡하기만 하다.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사슴의 심장은 무리한 나머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몸은 이틀 동안 쌓인 피로를 풀지 못한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 사냥꾼의 몸은 피로로 인해 무거워보였지만 약간의 휴식과 음식만 있다면 달리기를 이어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들 원주민에게는 그들의 언어로 ‘라라무리(raramuri)’ 즉, ‘달리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있기도 하다. 분명 인간의 장거리 달리기 능력은 다른 동물들의 그것에 비해 탁월하다.

 

 

가죽 샌달을 신고 뛰는 타라우마라(Taraumara)

 

 

신은 인간에게 ‘사고하는 능력’과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 그리고 ‘오래 달리는 능력’을 허락하였다. 네 발로 빠른 달리기를 포기하고 직립보행을 하며 정교한 손과 오래 달릴 수 있는 능력(튼튼한 다리와 신체구조)을 허락받았다. 네 발에서 두 발로 서고, 걸으며 달리는 진화과정을 통해 놀라운 질주본능과 잠재력을 갖게 된 것이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인간은 달린다.” 체코의 올림픽 영웅이며 ‘인간 기관차’로 불리는 자토펙의 말이다.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은 먹기 위해 달렸고, 동시에 먹히지 않기 위해 달렸다. 그리고 사랑을 얻고,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달렸으며 동시에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을 무찌르고, 그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달려 왔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장거리 달리기 선수로 우리 모두는 마라토너(Marathoner)인 셈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원주민 표현을 빌어 달리는 인간 ‘호모 라라무리(homo raramuri)’라 부르고 싶다.

 

 

 

ⓒ 스포츠둥지

 

 

  1. 타라우마라족의 사례는 크리스토퍼 맥두걸(Christopher Mcdougall)이 쓴 2009년의 베스트셀러 ‘Born to Run’에 실린 내용을 재작성 하였하였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