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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김연아 피겨스케이팅의 배경 음악

  

 

글/ 이성호 (한양대학교 영문학 명예교수)   

 

 

김연아  ⓒ대한체육회

*2011 세계선수권대회 사진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 1 쇼트 프로그램의 ‘그로테스크한 음악 지젤’
   김연아는 ‘지젤(Giselle)'과 ‘오마주 투 코리아 (Homage to Korea)'를 러시아에서 열연했다. 지난해 4월 30일 모스크바의 메가 스포츠 아이스 링크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프리 스케이팅’과 그 하루 앞서 거행된 ‘쇼트 프로그램’에서였다.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합계 194.50점을 얻어 195.79점의 안도 미키(일본)에 1.29점차로 뒤져 애석하게도 우승을 놓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내용이다. 두 프로그램의 종합 점수는 기술 점수와 예술 점수로도 나누어지는데, 가령 김연아가 기술에서 실수를 하여 가산점을 못 받았다고 해서 훌륭히 해낸 예술적 표현까지 묵살되는 것은 곤란하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김연아의 배경음악은 지젤 무용곡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베지의 노래’가 노르웨이의 구드브란스달 계곡에 사는 트롤(Troll) 민담과 관계가 있듯이, 이 무용곡도 독일 라인강 계곡의 민담을 바탕에 깔고 있다. ‘솔베지의 노래’가 극작가 입센이 쓴 극시 ‘페르 귄트(Peer Gynt)’에 작곡가 그리그가 부대 음악을 붙여서 태어났듯이, 지젤은 하이네(Heinrich heine)의 시 ‘독일과 윌리스 마녀들의 묘사(De l'Allemagne and its depiction of the Willis)’를 근거로 아돌프 아담 (Adolphe Adam)이 곡을 붙였다.


 노르웨이의 트롤이 그렇듯이 지젤의 내용도 유럽 북쪽에서 볼 수 있는 초자연적 요정이 끼어드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한편 낯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유연하게 이어지는 것이 우리 정서와 많이 닮아서 쉽게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 서양문화에서 볼 수 있는 직선적인 사랑보다는 우리 문화의 은근한 정 (情)적인 사랑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휘여 감기는 스토리를 김연아가 쇼트 프로그램에서 훌륭하게 표현한 것이다. 


 지젤은 라인 강가 포도밭 계곡 마을에 사는 시골 처녀다. 여기에 가을 포도가 익으면 왈츠가 흐르는 포도축제가 열린다. 공작 신분을 숨긴 한 시골 청년이 이 축제에 끼어든다. 지젤은 알브레흐트(Albrecht of Silesia)라는 이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운명적으로 곧 그의 약혼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신분도 밝혀진다. 이 충격은 순진한 지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다음 막으로 이어진다. 지젤이 묻힌 묘지다. 여기의 윌리스(Willis)라는 처녀 망령(Spirits)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남자들과 밤새도록 춤을 추어 급기야는 죽게 만든다. 지젤에게 사과하려고 찾아온 알브레흐트도 덫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지젤은 춤을 독차지하여 추면서 그를 구해낸다. 하지만 날이 밝자 그녀는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야 했다.


 김연아는 2분 50초 동안 홀로 춤을 추었다. 마치 윌리스 망령들 틈에서 사랑하는 알브레흐트를 구하려는 지젤처럼. 반 어깨띠의 검은 드레스를 입고 왼손을 왼쪽 옆구리위로 뻗쳐들고 연기를 시작한 김연아는 당차게 스텝을 밟더니 변신하듯 스핀을 돌고 우아하게 플립을 치다가 이제 자신의 무덤을 향해 돌아 가야하는 지젤처럼 이내 오른손을 오른쪽 옆구리위로 뻗쳐들고 고뇌에 찬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출했다. 어째서 거짓말을 했느냐고 따지고 미워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겪고도 이어가는 둥근 정을 김연아는 나무랄 데 없이 해냈다. 우아하게 이어가는 몸짓은 실로 일품이었다.

 

 

# 2 프리 스케이팅의 ‘사랑 노래 오마주 투 코리아’
  쇼트 프로그램에 이어 프리스케이팅에서도 김연아는 아리랑을 주제로 한 ‘오마주 투 코리아’를 배경음악으로 둥근 정을 잘 살리며 열연했다. 아리랑은 우리의 대표적인 민요다. 정선 아리랑으로 시작하여 그 가지 수도 여럿이다. 그러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는 가사를 모두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이를 두고 혹자는 ‘저주의 노래’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혹자는 ‘한 (恨)’의 노래’라고도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세상을 풍미했던 ‘다빈치 코드 (DaVinci Code)’를 2003년에, 그리고 6년 후에 ‘잃어버린 심벌(Lost Symbol)’를 출간한 작가 댄 브라운이 아리랑을 잘 부르고 이에 대한 일가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그가 때때로 한국 사람들이 아리랑을 두고 ‘저주’니 ‘한’이니 또는 ‘이별’이니 하는 말을 붙이면 크게 웃어댔다고 전한다. 그의 웃음으로 미루어보아 아리랑이야말로 한국적 정이 넘치는 사랑의 노래라고 그가 확신했던 것 같다. 가령, 아리랑을 영어로 ‘저주의 노래(A Cursing Song)냐 또는 ‘사랑의 노래(A Love Song)’냐 라고 묻는다면 ‘사랑의 이야기’라고 대답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문화에는 저주라는 말이 없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우리의 삶에서 우러나온 민요 아리랑을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이 노래는 우리방식대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찐득찐득하게 이어지는 삶의 노래임이 틀림없다. 아리랑은 그 삶의 일부인 사랑의 가락이다. 그 후렴을 들어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3-3-4 음절로 이어지는 이 가락은 우리의 삶을 정겹게 나타내는 흥얼거림이다. 사실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저주가 아니라 ‘내 곁에 있어주시오’라는 표현의 반어법이다. 김소월의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김연아는 이렇게 흐르는 우리의 정을 뛰고 돌고 미끄러지며 잘 보여줬다. 중간에는 조국의 발전을 나타내는 듯한 짧은 박자 춤을 소개하기도 했다. 문제는 ‘오마주 투 코리아’라는 배경음악의 제목이었다.


 영어 ‘homage’는 프랑스어 ‘hommage'의 차용어로서 존경(respect)을 뜻한다. 그런데 프랑스어 ‘hommage’는 중세 유럽의 그 흔한 성주에 대한 ‘충성의 맹세’ 또는 ‘헌신적 봉사’의 의미를 사실 그대로 안고 있다. 그래서 현대 민주사회 또는 국제사회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번역한 것을 보기도 했지만, ‘조국에 대한 감사’ 또는 ‘그리움’을 나타내려고 했지만 국제대회에서 그렇게 들릴지는 의문이다. 


 ‘오마주 투 코리아’라는 음악 자체는 좋았다고 생각된다. 중간에는 소리꾼의 가락이 끼어들어 더욱 우리의 정갈한 마음을 나타냈다. 마치 안익태의 ‘코리안 환타지’가 적어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경쟁을 벌이는 국제무대에서도 ‘한국에 대한 충성 음악’이 같게 들릴지는 의문이다. 이 음악의 주제는 많이 알려진 ‘아리랑(Arirang)’으로, 그리고 부제를 붙인다면 ‘아리랑, 한국의 사랑노래 (Arirang, a love song of Korea)’ 였으면 김연아가 우승을 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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